항목 ID | GC02205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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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舊馬山場-示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2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재우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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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3일 - 고종 황제 국장 행사 중 만세 행진 시작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독립 선언서 낭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21일 - 구마산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
종결 시기/일시 | 1919년 3월 21일 - 구마산 장날 시위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구마산 시장[현 마산 어시장]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 2가 |
종결 장소 | 구마산 시장[현 마산 어시장]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 2가 |
관련 장소 | 두척동 만세 시위 -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 무학산 |
관련 장소 | 추산정 독립 선언서 낭독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신길 190[추산동 41-6] |
성격 | 항일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임학찬|박순천|김필애 |
[정의]
1919년 3월 21일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구마산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
[개설]
1919년 3·1 운동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마산 지역[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3일 오전 11시쯤 두척산[무학산]에서 고종 황제 국장 행사에 모인 시민들에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항일 궐기를 고취하는 연설과 함께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었고 시민과 학생들은 만세 행진을 벌였다. 3월 10일에 추산정에서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잡혀갔다 훈방된 사람들이 창신 학교 교사 임학찬, 의신 학교 교사 박순천·김필애 등과 모의하여 일으킨 의거가 1919년 3월 21일 발생한 구마산 장날 의거이다.
[역사적 배경]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마산에서도 3월 3일 두척산 만세 시위와 3월 10일 추산정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구마산 장날 의거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이다.
[경과]
창신 학교 교사 임학찬, 의신 학교 교사 박순천·김필애 등이 구마산 장날인 3월 21일에 거사를 도모할 것을 합의하였다. 박순천은 서울로부터 비밀리 파견된 배동석으로부터 독립 선언서를 전달 받았다. 박순천과 김필애 선생은 당시 상급반이면서 지도력이 강한 최봉선 학생 집에서 여러 차례 거사를 계획했다.
창신 학교 쪽에서는 김순·한우 등 교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오스트레일리아인 나대벽(羅大闢) 교장과 그의 비서 겸 서기인 이성갑의 호의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 천 매의 독립 선언문을 등사하였다.
3월 21일 구마산 장터에 인근 창원면과 내서면,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 등 농촌 지역 사람들이 몰려들자 여자 보부상으로 위장한 김익렬에게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시장으로 옮기게 하고 정오경에 일제히 궐기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마산 주재 일본군 헌병과 경찰들은 비무장 시위 군중에게 총검을 휘둘렀고 진해의 일본군 해군 경비부에 연락하여 정박 중이던 전함 조무호(朝霧號)를 급히 마산항으로 오게 하는 등 전투태세를 갖추기까지 하였다.
[결과]
시위에 참여한 주동자 다수와 많은 시민들이 일제에 체포되었다. 이들 중 박순천을 비롯한 학교 관계 주동자들은 설립자인 이승규 장로와 나대벽 교장의 신원 보증과 간청으로 겨우 풀려났지만 일반 주동자들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으로서 지역의 학생과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의 만세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