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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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錫敏 |
영어음역 | Song Seokm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창원읍에서는 3월 23일과 4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송석민은 창원 지역의 중요한 3·1운동 가운데 하나인 창원읍 항일의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활동사항]
송석민은 설관수가 상남면 토월리에 살던 배중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읍내의 중동 청년회관에서 여러 사람과 비밀리에 거사준비를 논의할 때 함께 하며, 김호원과 함께 태극기 500여 매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사일인 3월 23일 설관수를 비롯한 주동자들과 더불어 창원보통학교에 있는 대수정(大樹亭)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거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창원읍에서는 4월 2일에도 2차 의거가 일어났는데, 이 일로 많은 사람이 경찰에 체포되고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때 송석민은 태극기를 만드는 등 적극 가담자였지만 그의 투옥 여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920년대 들어 송석민은 설관수와 더불어 1920년 6월 창원청년단을 결성하였다. 창원청년단은 1919년 12월 5일 안준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남면청년회와 더불어 초기 창원시의 청년운동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