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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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侵入 |
영어의미역 | Invasion of Japanese Invader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고려 시대 경상남도 창원 지역 해안에 일본 해적들이 출몰하여 자행한 약탈 사건.
[개설]
왜구란 대략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인 해적 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당시 왜구가 자행한 각종 노략질은 일반 민인들의 삶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운(漕運) 제도(制度)를 비롯한 여러 행정 체제에도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고려 시대 창원 지역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조운선이 경유하고 있어 왜구 침입이 빈번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 후기의 일본은 남북조(南北朝)로 정권이 양분되어 있는 내란기(內亂期)에 해당하였다. 중앙 권력이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가운데 유력한 무사(武士)들이 영지를 더욱 확대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농지를 잃은 농민들과 전쟁에 동원되었으나 보상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무력해진 하급 무사들이 속출하였다. 이들 몰락 무사들과 기근을 면치 못하고 있던 쓰시마[對馬島]·이키시마[壹岐島]·마쓰우라[松浦] 등의 영세 농어민들이 해적으로 결합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려의 연안 지역들은 이들의 우선적인 주요 약탈 대상 지역이 되었다. 특히 창원 지역과 그 주변에는 조창(漕倉)이 있고 조운로가 경유하였기에 중요한 표적이 되고 있었다.
[경과]
기록상 왜구가 처음 확인되는 시점은 1223년(고종 10)이나 1350년(충정왕 2)을 기점으로 침략 행위가 본격화 되었다. 왜구의 노략질은 거제와 합포·고성·죽림 등지에 걸치는데, 천호 최선(崔禪)과 도령 양관(梁琯) 등의 활동으로 한 때 3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351년(공민왕 원년)에는 왜선 50여 척이 합포에 침구하였다.
이들은 소규모 집단일 때에는 20척, 많을 때는 500여 척에 이르는 대선단(大船團)을 이루어 노략질 하였다. 특히 1376년(우왕 2)부터 이듬해 1월까지는 이들의 집중적인 침입이 이루어져, 회원창(檜原昌)이 습격을 당하고 합포영은 잿더미가 되었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1389년(창왕 원년)에는 경상도 원수 박위(朴葳)가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적선 300여 척과 가옥을 불태우고 붙잡혀 간 고려인 100여 명을 구하여 돌아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결과]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자 고려에서는 사절을 보내어 노략질을 금하는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군사를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토벌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왜구들의 약탈 행위는 조선 전기까지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 후기 왜구의 창궐은 창원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과 희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조정에도 큰 피해를 입혀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