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계 성당 쌍호 공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426
한자 安溪聖堂雙湖公所
이칭/별칭 청호리 공소,천주교 안계 성당 쌍호 공소,쌍호 공소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안사풍천길 1070-5[쌍호리 15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창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91년연표보기 - 쌍호 공소 설립
현 소재지 쌍호 공소 -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쌍호리 156
성격 공소
전화 054-553-0005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청호리에 있는 천주교 안동교구 안계성당 소속 공소.

[개설]

신유교난(辛酉敎難)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따르면 1801년 경상도로 귀양 온 56명의 신자 가운데 강성철(姜成喆)이 의성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의성군 안사면 쌍호동에는 서울에서 천주교를 믿다가 박해를 받아 이곳으로 피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박근하의 7대 선조인 박수광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 신자들이 먼저 정착하게 된 까닭은 이곳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북도 예천군, 안동시가 서로 접하는 경계 지점인데다 오지 마을이어서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건으로 여러 신자들이 모이면서 청호리는 자연히 교우촌이 형성되게 되었다. 그리고 1891년 김보록 신부가 공소를 순회하던 중 청호리 교우촌에서 성사를 집전하였는데, 이것이 청호리[쌍호] 공소가 처음으로 공소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1893년에는 조선 교구장인 뮈텔 주교가 쌍호 공소에서 견진 성사를 주었는데, 당시 신도의 수는 12가구 50여 명이었다.

1900년 이후에도 계속적인 전교가 이루어져 이웃의 여러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교를 했다. 1934년에는 신자 수가 공소 집에 비해 너무 많아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 공소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 8월 15일 8칸의 신축 공소 봉헌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밑바탕이 되어 현재까지 쌍호 공소가 그 맥을 이어 오고 있다.

[변천]

1893년 무텔 주교의 방문 이후 쌍호 공소의 신자는 꾸준히 늘어났다. 그 이유는 그 동안 계속되었던 박해가 거의 사라졌고, 왜관에 가실 성당이 설립되면서 봄, 가을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성사를 거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쌍호 공소가 건립된 1934년에는 신자의 수가 처음의 3배에 가까운 14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쌍호 공소가 걸어온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말기에 이르자 일제의 발악은 극에 달했다. 1940년 전시 국민 생활 체제라는 것을 발표하여 황성 요배, 신사 참배, 황국 신민의 서사를 강요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건물 징발을 비롯해 교회의 종이나 성물을 비행기나 대포, 또는 탄환 제조를 위해 강제로 징발해 갔다. 일제의 이러한 탄압에서 쌍호 공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945년 4월 일제는 쌍호 동장을 통해 공소의 건물과 성물들의 징발을 통고해 왔다. 그러자 신자들은 모든 것이 대구 교구 주교의 것으로 그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버티고, 이를 하야사카 주교에게 보고하여 겨우 무마시킬 수 있었다.

이어서 일어난 6·25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많은 상처를 남긴 전쟁이기는 했지만, 쌍호 공소뿐만 아니라 의성 지역 전체의 천주 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미국 가톨릭 구제회(NCWC)의 구제 물품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천주 교회로 많이 입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50년대에 들어서 의성 지역에 의성 공소·안계 공소·다인 공소가 생겨났다.

1970년대에 들어 농촌 경제난으로 이농 현상이 가속화되자 쌍호 공소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공소의 신자를 중심으로 농민회가 결성되고 정부의 부당한 농정에 적극적으로 맞섰다. 우편물 배달 사건, 소 수입 개방 반대 시위, 담배 수입 반대 운동 등이 가톨릭 농민회 쌍호 분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대에 이르러 피폐해져 가는 농촌 경제를 살리기 위해 쌍호 공소에서는 생명 공동체를 결성했다. 이 모임을 통하여 농민 살리기 운동과 환경 보존 운동, 우리 농산물 직거래를 통한 생산자와 소비자 보호 운동, 유기농법으로 무공해 내지 저공해 농산물 생산 등 우리 삶을 밝게 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동안 농촌 활동을 통한 포교 활동을 레지오 마리애 신심 활동을 통한 선교 활동으로 전환하였다. 2001년과 2002년에 설립된 ‘주님의 종’ 쁘레시디움과 ‘구세주의 어머니’ 쁘레시디움이 바로 그것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쌍호 공소의성군 안사면 쌍호리안사면 월소리 주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본당인 안계 성당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를 보고 있다. 또한 생명 공동체를 결성하여 농민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농촌 경제의 활성화와 도농 간의 연계를 모색하고 있다.

[현황]

현재 허춘학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100명 남짓의 신도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쌍호 공소는 설립된 지 200년을 넘기고 있다. 거기에는 의성 지역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의의와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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