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세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075
한자 裵世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2월 17일연표보기 - 배세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배세태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 독립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3일 - 배세태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43년 7월 26일연표보기 - 배세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 - 배세태 대통령 표창 추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배세태(裵世泰)[1890~1943]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동리 주민들과 함께 대사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배세태는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다음 날에도 오후 8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어 3월 17일에도 오후 8시경 마을 주민 150여 명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군중은 안평면 마전·기도·괴산동을 돌면서 4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창길동의 안평 주재소에 앞에 당도하여 10여 분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위 군중은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이에 의성 경찰서는 순사 부장 이하 2명을 보내 안평 주재소 순사와 함께 시위 주동자의 체포에 나선 결과 12명이 체포되었다.

배세태는 3월 18일 밤에도 전날보다 더 많은 300여 명의 군중들과 더불어 대사동 우리곡에서 만세를 부른 후 다시 안평면 마전동·기도동·창길동·박곡동·괴산동을 누비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시위 군중들과 창길동에 있는 안평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일본인 순사부장과 한인 순사 및 군청 직원 등을 제압한 뒤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또 3월 19일 도리원 장터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시위 군중을 규합하여 의성 경찰서로 행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4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안평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전개한 후 박곡동·석탑동·신월동을 거쳐 불어난 시위 군중 700여 명과 함께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나아갔다. 이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3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18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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