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063
한자 朴秀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3년 11월 8일연표보기 - 박수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7일~19일 - 박수영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독립 만세 시위 참여|참가 종료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14일 - 박수영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69년 11월 6일연표보기 - 박수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박수영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수영(朴秀永)[1893~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3월 16일 이북술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 행진을 하고, 17일에는 안평면 대사동을 비롯하여 마전·기도·괴산동 등지에서 참여한 4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그리고 3월 18일 안평 주재소 습격과 3월 19일 도리원 만세 시위와 도리원 주재소 습격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3월 17일 150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안평면 괴산동(槐山洞)을 출발하여 창길동(倉吉洞)·삼춘동(三春洞) 일대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해산하였다. 이어 18일 밤에는 다시 3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박곡(朴谷)·석탑(石塔)·신월동(新月洞) 일대에서 만세 시위를 하고 19일 괴산동에서 도리원 장날을 기해 전개된 도리원 시위에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봉양면(鳳陽面) 사부동(沙阜洞)까지 만세 시위를 벌이고, 나아가 몽둥이와 돌을 들고 도리원 주재소로 몰려가 그곳을 포위하여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박수영은 1919년 7월 14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언도 받고, 8월 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2.15 [활동사항]수정 [활동사항]에 표기된 생몰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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