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003
한자 李擢英
이칭/별칭 효사재(孝思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 1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1년연표보기 - 이탁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1년 - 이탁영 의성현 이방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3년 - 이탁영 경상도 감영 영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이탁영 김수 진영에 참가
몰년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 이탁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01년 - 충효사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23년 - 충효사 재건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 1리지도보기
활동지 임진왜란 참전지
묘소 이탁영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중리리 산123지도보기
성격 학자|창의 의병|효자
성별
대표 경력 임진왜란 유공|『정만록(征蠻錄)』 저술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의병·학자·효자.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수(子秀), 호는 반계(盤溪), 효사재(孝思齋). 경주 이씨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24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건(李建)이고,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 이연년(李延年)이고, 어머니는 김철손(金哲遜)의 딸 분성 김씨(盆城 金氏)이다.

[활동 사항]

이탁영(李擢英)[1541~1610]은 1541년(중종 36) 경상도 의성현 지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비범하여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8세 때 학업을 시작하고 부지런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였으며, 글방을 왕래하는 것 외에 부모의 곁을 떠남이 없었고, 특히 효심이 지극하였다고 전해진다. 17살 때 아버지가 타향에서 죽자 수백리 길을 가서 관을 모셔와 반장하였고, 어머니가 나이 예순에 두 눈이 멀게 되자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직접 숟가락으로 진지를 드렸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장례에 대한 일이 아니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읍지(邑誌)에 전해질 만큼 효심이 지극하였다.

1561년(명종 16) 21세가 되면서 의성현의 향리(鄕吏)로 나아가 이듬해에 이방(吏房)이 되었고 1563년 경상도 감영의 영리(營吏)로 발탁, 승진되어 출중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40여 년간을 경상도의 영리로서 지방 행정 업무를 관장하였고 탁월한 행정 처리 능력으로 영리들의 사표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관찰사 김수(金晬)의 진영에서 모병과 군량 조달, 정보 수집과 분석, 작전의 방책을 건의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계초(啓草)도 직접 작성하였다. 김수가 조정에 소환된 이후에는 주로 당시 초유사(招諭使)였던 김성일(金誠一)과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참모로 7년간 활동하였다. 난이 평정되어 가는 60세까지 노구로 끝까지 참전하였고, 종전 후에는 전공으로 관직을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귀향 후에는 피난 당시 눈이 먼 노모를 봉양하는데 전념하고 모든 시중을 혼자서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 향인들이 여러 차례 포상을 신청하여 자손들에게도 복호(復戶)되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저술 및 작품]

1592년 4월 13일부터 1599년 난이 평정될 때까지 8년간의 전란 일기를 지어 나라에 올렸다. 임금이 직접 『정만록(征蠻錄)』이라 이름을 지어 계하(啓下) 하였다. 임진란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그 밖에 『자성기(自省記)』, 『해이록(解頤錄)』을 남겼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묘소]

묘는 의성군 의성읍 중리리 산123 호현(狐峴)에 있다.

[상훈과 추모]

나라에 충성하고 어머니 봉양에 지극하여 부모의 은혜를 갚았으므로 1801년(순조 1) 충효사(忠孝祠)를 세웠다가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23년 유림의 발기로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지곡(芝谷)충효사를 영건하여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숙종 때 사곡은전(賜穀恩典)을 하사받았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증직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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