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951
한자 姜峻馨
이칭/별칭 덕수(德綬),국농(菊農)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하창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1년연표보기 - 강준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강준형 고종 승하 때 축단, 망곡의 행사를 주선
몰년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강준형 사망
출생지 강준형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지도보기
묘소|단소 깅준형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진주(晉州)

[정의]

개항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수(德綬). 호는 국농(菊農).

[활동 사항]

강준형(姜峻馨)[1861~1935]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버이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이에 맏형을 어버이 같이 받들며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항상 물어서 행하고 마음대로 하는 일이 없었다. 맏형 또한 우애가 깊어 그에게 “네 두 형은 이미 공부할 시기를 놓쳐 할 수 없으니 너만이라도 글을 배우도록 해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라 말하며 학문의 길로 나가도록 하였다.

집안이 지극히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맏형의 배려로 일가인 구당(龜堂)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을 수 있었다. 언제나 “분수를 아는 것이 선비의 도리다.”라는 말로 스스로의 덕행을 쌓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정성을 다하여 그 공적이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1919년 봄 고종이 승하하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망곡하는 일을 주선하고 시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 임좌(壬坐), 곧 위천(渭川)의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세상을 떠난 뒤 정휘옥(鄭輝玉)이 묘갈문을 짓고, 사림에서는 묘비를 세웠다. 문집으로 『국농집(菊農集)』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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