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홍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925
한자 申弘道
이칭/별칭 대중(大中),정봉(鼎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8년연표보기 - 신홍도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11년연표보기 - 신홍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17년 - 신홍도 매강 서원에 배향
출생지 신홍도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지도보기
수학|강학지 신홍도 강학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지도보기
묘소|단소 신홍도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오로리 오토산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매강 서원 -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지도보기
성격 학자|의병장
성별
본관 아주(鵝洲)
대표 관직|경력 유일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대중(大中), 호는 정봉(鼎峰). 신수(申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원복(申元福)이고, 아버지는 신엄(申儼)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선산 김씨(善山 金氏) 김윤덕(金潤德)의 딸이고, 부인은 안동 김씨(安東 金氏) 김응용(金應鏞)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홍도(申弘道)[1558~1612]는 6세에 『대학』, 9세에 『논어』를 읽었으며, 20세 때에 집 동쪽 5리에 위치한 선암사(仙巖寺)[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에서 공부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따르면, 1592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에서 김해(金垓)가 창의를 하자 그는 의성에서 창의하여 김해의 통솔을 받았다고 한다. 전란 초기 첨사(僉使) 배경남(裵慶男)이 패주를 거듭하며 도망치자 그의 죄상을 순찰사에게 알리고, 장사진(張士珍)으로 교체를 청하여 허락을 받기도 했다. 1593년 명나라 원병들이 인근으로 남하해 오자, 그들의 군량을 마련하는 데 힘을 썼다. 1598년 명나라 유격 장군(遊擊 將軍) 엽방영(葉邦榮) 부대의 주둔지가 안동에서 의성으로 옮겨졌는데, 병졸들의 횡포가 심하여 고을의 많은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섭엽방에게 편지를 보내 보급 문제에 대해 논의한 뒤 그들의 횡포를 진정시켰다.

1600년(선조 33) 관찰사가 유일(遺逸)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한 뒤 선암사 아래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다. 1603년에는 관찰사로부터 임진왜란 때의 사적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았다.

1608년 광해군 즉위 직후, 대북(大北) 세력이 서인(西人) 학통을 공격하자, 서인의 유생 고경리(高敬履)정철(鄭澈)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상소문 가운데 오현(五賢)을 언급하면서, 이언적(李彦迪)을 누락하자 상소문을 올려 그 잘못됨을 논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 배척을 요구하는 ‘회퇴변척(晦退辨斥)’의 논의를 일으키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학문과 저술]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장현광(張顯光)서사원(徐思遠)퇴계 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향촌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인조 연간 척화론을 주창하였던 신적도(申適道), 신달도, 신열도(申悅道) 형제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서인 『성리휘언(性理彙言)』, 예학서인 『상례고증(喪禮考證)』, 선대의 장갈문을 엮은 『영모록(永慕錄)』을 지었다고 하나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아주 신씨 대동보』에는 유고(遺稿)만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묘는 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오로리 오토산(五土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매강 서원(梅岡 書院)신원복(申元福), 신류(申瑠)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아주 신씨 대동보』에 의하면, 신홍도의 위패는 1817년(순조 17) 배향되었고, 유심춘(柳尋春)이 봉안문(奉安文)을 찬(撰)하였다. 2009년에는 의성의 유림 김창회(金昌會)가 묘갈명을 찬(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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