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919
한자 申元福
이칭/별칭 중수(仲綏),정은(靜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09년연표보기 - 신원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신원복 헌릉 참봉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84년연표보기 - 신원복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07년 - 신원복 매강 서원에 배향
출생지 신원복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매강서원 -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지도보기
성격 효자|유학자
성별
본관 아주(鵝洲)
대표 관직|경력 참봉

[정의]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학자이자 효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중수(仲綏). 호는 정은(靜隱). 아버지는 참봉을 역임한 신수(申壽), 어머니는 주부(主簿)를 역임한 박자검(朴自儉)의 딸 의흥 박씨(義興 朴氏), 할아버지는 훈도(訓導)를 역임한 신준정(申俊禎), 증조할이버지는 의성 입향조로 알려진 생원(生員) 신석명(申錫命), 부인은 생원 이숭년(李崇年)의 딸 흥양 이씨(興陽 李氏)로 알려져 있다. 동생인 신원록(申元祿)은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그 행적이 수록되었다.

[활동 사항]

신원복(申元福)[1509~1584]은 1509년(중종 4) 경상도 의성현 남쪽 원흥리(元興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동생 신원록과 더불어 어릴 때부터 효우가 있어서,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아버지 신수가 오랫동안 병환이 있었기에, 신원복은 동생과 함께 정성껏 시탕(侍湯)을 하였다. 18세가 되던 어느 날 의원이 말하기를 팔공산(八公山)에 가면 약초가 있다고 하였다. 11세였던 동생 신원록이 혼자 약초를 캐러 가겠다고 하자, 신원복은 이를 민망히 여기며 자기가 혼자 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신원록이 말하기를 “부모를 위해 약초를 캐러 가는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다”하고 말하며 떠나니, 과연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 8년 동안 동생과 더불어 성실히 주야로 간호하였지만, 1533년(중종 28)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친의 묘를 팔지산(八智山)[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아래에 마련하려 했으나, 주민들이 이를 금지하였다. 이에 신원복은 묘자리를 얻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울면서 비니, 주민들도 감복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신원복은 가족을 이끌고 팔지로 이주하였으며, 동생과 함께 3년간 여묘살이를 했다. 여묘살이가 끝난 후에는 묘소 아래에 재실을 세웠다.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직접 대변까지 맛보며 정성을 다하였으나, 결국 1575년(선조 8) 세상을 떠났다. 부친 묘소에 합장하였는데, 장례 때 신원록과 더불어 역부들이 해도 되는 온갖 집역(執役) 스스로 하였으며, 이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세 번씩 묘소에 가서 곡을 했다고 한다.

한편, 1543년(중종 38)에는 인근 고을로 부임한 풍기 군수(豊基 郡守)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지으려고 하자, 신원복은 동생 신원록을 보내어 그를 스승으로 받들게 하였다. 풍기에서 돌아온 신원록은 의성에도 서원이 필요함을 건의하였고, 형제가 의논한 끝에 김안국(金安國) 배향의 서원을 1556년(명종 11) 장천(長川)[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을 지나 흐르는 남대천 상류 지역] 위에 건립하였다. 1576년(선조 9)에는 장천 서원(長川書院)으로 사액을 받으니, 훗날 옮겨 지은 빙계 서원(氷溪書院)[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에 위치]의 전신이다. 동생 신원록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의 효성을 기리는 『효우록(孝友錄)』을 작성하였다. 1580년(선조 13) 천거를 받아 헌릉 참봉(獻陵 參奉)에 제수되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선조 17)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동생 신원록의 효성을 기록한 『효우록』이 전한다. 1책 8장의 등초본(謄草本)이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가계부터 시작해서 신원록의 임종까지 그 일대기를 연대기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외 유집(遺集)이 있다고 『교남지(嶠南誌)』에 기록되어 있다.

[묘소]

의성현 팔지산[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의 동생 묘소 아래에 장례를 지냈다.

[상훈과 추모]

1807년 건립된 매강 서원(梅岡書院)[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에 위치]에 배향되었다. 매강 서원에는 손자 신홍도(申弘道), 증손자 신류(申瑠)도 함께 배향되어 있다. 배향 당시 봉안문(奉安文)은 류심춘(柳尋春)이 작성하였으며, 1920년 서원 중건 후 복향 될 때에는 이돈유(李敦裕)가 봉안문을 작성하였다. 한편 신원복의 묘갈명(墓碣銘)은 류규(柳氵+奎 )가 1799년(정조 23)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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