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631
한자 鳳陽里碑石-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 363-1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16년 9월연표보기 - 현인복 영세 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46년 10월연표보기 - 홍병도 영세 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85년 3월연표보기 - 남정린 영세 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42년 4월연표보기 - 개천제 중축 기념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83년 8월 - 홍병도∙홍병도∙남정린 영세 불망비 보수 이건
현 소재지 봉양리 비석 떼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 363-1지도보기
성격 영세 불망비|중축 유지비
관련 인물 남정린|현인복|이광철|우원충|홍병도|강기덕
재질 사암
크기(높이) 134.5㎝[남정린 영세 불망비]|104.2㎝[현인복 영세 불망비]|99.5㎝[홍병도 영세 불망비]|118㎝[개천제 중축 기념비]
크기(너비) 44.3㎝[남정린 영세 불망비]|38.8㎝[현인복 영세 불망비]|52㎝[홍병도 영세 불망비]|39.5㎝[개천제 중축 기념비]
크기(두께) 12.5㎝[남정린 영세 불망비]|14.4㎝[현인복 영세 불망비]|16.7㎝[홍병도 영세 불망비]|15.5㎝[개천제 중축 기념비]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에 있는 근대 이후 비석 떼.

[개설]

봉양리 비석 떼는 모두 개천지[개천 저수지]와 관련된 것으로 당시로서는 최고 최대의 수리 시설을 축조 보수한 것을 기념하여 수령의 공덕을 영세에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특히 개천제 중축 기념비는 중축의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서 의미가 크다.

4기의 비석이 가지런히 서 있는 개천제는 순조 때 비안 현감 현인복과 고종 때 남인진 현감 등이 축조하고, 1913년 강기덕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건립 경위]

구체적인 건립 경위는 알 수 없으나 비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세 현감의 공적과 건립 연대, 관련 인물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위치]

봉양리 비석떼는 의성군 안계면 봉양 2리에 있다. 중앙 고속 도로 의성 IC에서 국도 28호선을 따라 안계면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안계면소재지에서 개천사 쪽으로 우회전하면, 개천 저수지가 나온다. 봉양리 비석 떼개천 저수지 못둑 위에 모여 있다.

[형태]

① 현감 남정린 영세 불망비는 1885년(고종 22) 초창, 비신은 사암에 가까운 석질이며, 기단석과 지붕돌[가첨석]은 1983년 보수 이건시 기계 작업으로 잘라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보수 이건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② 현감 현인복 영세 불망비는 1816년(순조 16) 초창, 석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지붕돌은 없고 월두형이다. 앞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③ 현감 홍병도 영세 불망비는 1846년(헌종 12) 초창, 기단석은 1983년 보수시에 기계로 자른 화강석으로 하였고, 비신의 석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규수형이다.

④ 개천제 중축 기념비는 1942년에 세워졌는데, 기단석은 1983년 보수시에 기계로 자른 화강석으로 하였고, 비신은 오석이다. 가첨석은 지붕형[옥개형]이다.

이 4개의 비석 중 영세 불망비 3기는 이곳에서 가까운 자리에 조성되었다가 1983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자연석 바위 위에 시멘트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비의 죄대를 두고 비석이 서 있어서 비교적 안정적이다. 이 중 ② 현감 현인복 영세 불망비와 ③ 현감 홍병도 영세 불망비 2기는 지붕돌이 없는 월두형·규수형 비신이다. 또한 석이류가 많이 번져 있어 글자 판독이 쉽지 않으며, 연유는 알 수 없으나 ③ 현감 홍병도 영세 불망비는 비신 아랫부분 불망비라 새긴 망(忘)자 높이에 가로로 완전히 깨어진 것을 붙인 흔적이 뚜렷하다. 그리고 소자(小字)로 된 비석 우측 하단쪽 깨어진 부분의 두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

[금석문]

1. 현감 남정린 영세 불망비(縣監 南廷麟 永世 不忘碑)

남정린(南廷麟)은 1882년 비안 현감에 제수된 인물이다. 비석은 1885년 세워졌으며, 1983년 이곳으로 보수·이건하였다. 비석 전면에 대자로 ‘현감 남후정린 영세 불망비(縣監南侯廷麟永世不忘碑)’라 쓰여 있고, 소자로 ‘출재이섬민력 재가용혜 제익고 축제이제민생 아후지덕난위명(出財以贍民力 財可用兮 堤益高 築堤以濟民生 我侯之德難爲名)[재물을 내어 백성의 힘을 넉넉하게 하니, 재물을 가히 쓸 수 있음이여! 제방은 더욱 높도다. 제방을 쌓아 민생을 구제했으니 우리 현감의 덕 가름하기 어렵도다.]’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이어서 아래와 같이 참여자 명단과 보수·이건 사실을 명기해 놓았다.

도감 유학 강대식(都監 幼學 康大植)

별도감 유학 정재남, 변용구(別都監 幼學 鄭在南, 卞龍九)

감관 김병환(監官 金炳煥)

별감고 박소근철(別監考 朴小斤喆)

고종이십이년 을유(高宗二十二年 乙酉 三月 日 開天堤立)

의성 농지 개량 조합의 한동선 조합장의 주선으로 우측 이좌의 비석과 함께 보수 이건함[韓東善 義城農地改良組合長의 周旋으로 右側二座의 碑石과 함께 補修移建함]

서기 1983년 계해 팔월 일(癸亥 八月 日)

2. 현감 현인복 영세 불망비(縣監 玄仁福 永世 不忘碑)

무인으로 홍경래 난(1811년)에 큰 공을 세우고 『진중일기』를 남겼다는 현인복(玄仁福)의 비석이다. 비석 전면에 큰 글자로 ‘현감현후인복영세불망비(縣監玄侯仁福永世不忘碑)’라 쓰여 있고, 작은 글자로 ‘축지소제 만세류택 윤이곽하 사야구가(築之蘇堤 萬世流澤 潤以郭河 四野謳歌)[개천지를 축조하여, 만세토록 은택이 흐르네. 곽하로서 윤택하게 하니, 사방들판이 칭송의 노래 부르네]’라고 쓰여 있다. 이어 건립 연월과 참여자를 아래와 같이 명기하였다.

순조십육년 병자구월일 개천제립(純祖十六年 丙子九月日 開天堤立)

별감관 이광철(別監官 李光喆)

별도감 유학 우원충(別都監 幼學 禹元忠)이라 새겼다.

3. 현감 홍병도 영세 불망비(縣監 洪秉道 永世 不忘碑)

전면에 대자로 ‘현감홍후병도영세불망비(縣監洪侯秉道永世不忘碑)’라 하고, 소자로 ‘축제고혜 공덕구고 제택혜 덕불저수심혜 은택동심 수불갈혜 택불○○(築堤高兮 功德俱高 堤澤兮 德不儲水深兮 恩澤同深 水不渴兮 澤不○○)[쌓은 제방 높음이여 그 공덕 함께 높도다. 제방의 혜택이여 덕이 모인 물과 같고 은택이 함께 깊도다. 물이 마르지 않음이여 은택도 마르지 않도다.]’라 되어 있다. 이어 건립 연월을 ‘헌종 십이년 병오 시월 일 개천제립(憲宗 十二年 丙午 十月 日 開天堤立)’이라 새겨 놓았다.

4. 개천제 중축 기념비

전면에 큰 글자로 ‘개천제 중축 강기덕 기념비 외십칠인(開天堤 重築 康基德 記念碑 外十七人)’이라는 비명을 새기고, 측면에 건립 연월과 참여자를 ‘소화십칠년임오사월일설립인몽리자일동(昭和十七年壬午四月日設立人蒙利者一同)’이라 새겨 놓았다.

[현황]

비지정 문화재이며, 보호 시설이나 안내 표지판은 없다.

[의의와 평가]

① 현감 남정린 영세 불망비, ② 현감 현인복 영세 불망비, ③ 현감 홍병도 영세 불망비, ④ 개천제 중축 기념비는 모두 개천제 축조와 보수에 관련된 것이다. 지금부터 약 200년전인 1816년 대규모의 저수 시설을 축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대역사와 관련하여 고을의 수장인 현감에 대하여 영세 불망비를 건립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개천제 축조 과정에 대한 구체적 예산·인력·공정 등 전말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출신인 오봉 신지제(申之悌)의 「구미보 신장 도목 완의(龜尾洑 新粧 都目 完議)」 같은 것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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