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630
한자 龍川里碑石-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용천리 474-7답
시대 근대/개항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병호 충렬사 유지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98년 4월 3일연표보기 - 박서생 사적비 건립
현 소재지 용천리 비석 떼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용천리 474-7답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야은 길재 문인|변계량|조말생
재질 석재
크기(높이) 166㎝
크기(너비) 50.5㎝
크기(두께) 17㎝[지붕돌 79ⅹ55㎝, 높이 38㎝]
소유자 비안 박씨 병애 종중
관리자 비안 박씨 병애 종중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용천리에 있는 근대 이후 건립된 비석 2기.

[개설]

박서생의 행적을 기록한 사적비와 병호 충렬사의 옛터임을 알려주는 유지비이다. 박서생야은 길재의 제자로 조선 초 다방면에서 활약한 학자로 사적비는 그의 삶을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병호 충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박충인(朴忠仁)박효순(朴孝純)을 배향했던 서원이었으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지금은 유지비만이 서있다.

[건립 경위]

박서생 사적비의 경우, ‘대한 광무 이년 무술 사월 삼일(大韓 光武 二年 戊戌 四月 三日)’이라 새겨져 있어 1898년에 비가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호 충렬사 유지비의 경우, ‘계유 십월 일 립(癸酉 十月 日立)’이라는 데서 비의 건립이 서원 훼철령 이후인 1873년 또는 193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두 비석을 누가 세웠는지는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박서생박충인박효순 모두 비안 박씨이며 비석 떼 주위의 산들이 대부분 비안 박씨의 종중 소유인 점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두 비석 모두 비안 박씨 종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위치]

용천리 비석 떼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용천리에 있다. 용천 2리 경로당의 좌측 약 50m 후방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박서생 사적비는 비교적 널찍한 기단에 홈을 파고 사각의 비신을 세웠으며, 지붕돌[가첨석]은 와가 지붕 형태이다.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에 원주를 세우고 사면에 홍살을 설치한 비각이 있다. 비각의 지붕은 기와로 마감되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비신 폭 50.5㎝, 높이 137㎝, 두께 17㎝이다. 지붕돌은 79×55㎝이며, 높이는 38㎝이다. 글자의 크기는 6.5×7㎝이다. 비에는 전면에 ‘유명조선 가선대부 이조참판 율정 박서생 사적비(有明朝鮮 嘉善大夫 吏曹參判 栗亭 朴瑞生 事蹟碑)’ 라 큰 글자로 새겼다. 비문에는 박서생의 학풍, 야은 길재와의 관계 등 박서생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다. 말미에 대한 광무 이년 무술 사월 삼일(大韓 光武 二年 戊戌 四月 三日)[1898년]에 비를 세웠고, 춘추관 기주관 정하묵이 비문을 짓고[春秋館 記注官 丁河黙 撰], 비안군 초대 군수 김용배가 썼다[比安郡 初代郡守 金容培 書]고 되어 있다.

충렬사 유지비의 크기는 비신 폭 52㎝, 높이 166㎝, 두께 27㎝이다. 지붕돌은 84×72㎝, 높이는 3㎝이다. 글자의 크기는 14×18㎝이다. 전면에 ‘병호 충렬사 유지비(屛湖忠烈祠遺址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 ‘계유 십월 일 립(癸酉 十月 日立)’이라 각자되어 있다.

[현황]

박서생 사적비는 중간중간에 마모가 있다. 육안으로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은 탁본을 해서 판독해야 할 정도이다. 비각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훼손 정도가 심하다.

박서생 사적비는 비각 안에 있으나 안내 표지판은 없으며, 병호 충렬사 유지비는 보호 시설이 없으며 안내 표지판도 없다.

[의의와 평가]

박서생은 의성이 배출한 조선 초 실용학을 대변하는 인물이며 사적비는 이러한 그의 삶을 전해주는 금석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이 사적비는 1898년 제작한 것으로 비안현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하지만 박서생에 관한 실록의 기록 외에는 현전하는 자료가 없어 사적비의 내용을 검증하기에 무리가 있으며, 사적비나 비각의 구조나 조각 수법도 평범하여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기에도 어려운 면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2012년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였으나 위원회 심의 결과 전반적으로 문화재 지정 기준에 미달하고 건립 연대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유로 부결되었다.

병호 충렬사 유지비의 경우, 서원 훼철로 인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병호 충렬사의 유일한 유적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비석에는 병호 충렬사에 대한 설명이나 특이점, 훼철 당시의 상황 등과 같은 제반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건립 연대 또한 박서생 사적비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만큼 건립 연대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적 가치는 그리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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