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515
한자 比安鄕校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화길 65-14[교촌리 28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훼철|철거 시기/일시 1592년 - 비안향교 임진왜란 중 소실
이전 시기/일시 1610년 - 비안향교 재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10년 - 비안향교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716년 - 비안향교 광풍루 중건
이전 시기/일시 1737년 - 비안향교 읍치 북쪽 15리 지점으로 이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887년 - 비안향교 명륜당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898년 - 비안향교 보수(1898)
개축|증축 시기/일시 1921년 - 비안향교 광풍루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24년 - 비안향교 담과 삼문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35년 - 비안향교 보수(1935)
개축|증축 시기/일시 1947년 - 비안향교 명륜당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1년 - 비안향교 대성전 보수
이전 시기/일시 1983년 - 비안향교 표의각을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옥연 2리로 이전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3년 - 비안향교 교직사 보수(1983)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4년 - 비안향교 광풍루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92년 11월 26일연표보기 - 비안향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비안향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4년 - 비안향교 교직사 보수(1994)
현 소재지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285지도보기
성격 향교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5칸[대성전]|2칸[동무]|3칸[서무]|4칸[명륜당]
측면 칸수 3칸[대성전]|1칸[동무]|1칸[서무]|2칸[명륜당]
소유자 경상북도 향교 재단
관리자 비안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지방 국립 교육 기관.

[개설]

비안향교(比安鄕校)는 비안현(比安縣)과 안정현(安貞縣)의 유생들이 머물면서 수학한 중등 교육 기관이다. 동시에 문묘가 설치된 제향의 공간이자 향청·서원과 더불어 향촌 자치 기구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조선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위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화길 65-14[교촌리 285]에 있다. 교촌리에 들어서면 도로 왼쪽으로 교촌 농촌 체험 학교가 나오는데, 학교 옆 길목에서 좌회전한 뒤 130m가량 이동하면 비안향교 주차장이 있다.

[변천]

비안향교는 창건 당시의 기록이 소략하여 역사를 명확히 밝히는 데 어려움이 있다. 조선의 개창과 함께 향교가 설립되었거나 1421년(세종 3) 안정현비옥현이 통합되며 안비현(安比縣)으로 이름을 고쳤을 때, 혹은 1423년 다시 비안현으로 이름을 고치고 비옥에 치소를 두었을 때 설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안향교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는데, 이 때 지역 사람인 손복이 향교의 위패를 산중에 있는 굴 안에 숨겨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가 1758년 편찬된 『비안여지승람(比安輿地勝覽)』에 전해진다. 전소된 향교는 유생들의 협의를 통해 중건이 결정되었다. 5년간 준비를 한 후 1608년(선조 41) 공사를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공하였다. 중건 연대는 ‘만력 무신(萬曆戊申)’이라는 명문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비안향교는 1737년(영조 13) 다시 읍치 북쪽 15리 지점으로 이건되었다. 1887년(고종 24)에는 명륜당이 화재를 입어 이를 재건하면서 대성전의 기와를 가는 보수도 함께 하였다. 일제에게 국권을 피탈당한 후에는 관학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지만, 지역 유림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운영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수차례에 걸친 중수와 보수 작업을 통해 잘 정비된 모습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92년 11월 2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비안향교는 동쪽 높은 대지에 대성전을 두고 그 아래 명륜당을 세워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성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공자를 비롯한 5성, 송조의 6현, 해동 18현을 배향한다. 2000년에 단청하던 중 상량문을 발견하였으나 다시 종도리 장혀에 넣어 밀폐하였다. 대성전 앞에서는 동무와 서무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동무는 전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건물이고, 서무는 전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명륜당은 전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전면은 이익공이며 배면은 초익공으로 처리한 익공 계열이나 살미의 형상이 동일하지 않아 이건과 중수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 다수의 기문이 걸려 있고, 전면 우측 어칸 상부에 ‘명륜당(明倫堂)’ 현판이 걸려 있다. 동·서재는 없다. 원래 건축하지 않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기록에도 동·서재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건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1716년에 건립된 광풍루는 원래 강궤루(降軌樓)라는 이름의 단층 건물이었는데, 1985년 개축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중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이다. 외삼문은 전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좌측에 비안 향교 유도 중흥 기념비(比安鄕校 儒道 中興 紀念碑)가 있다. 이 밖에 교직사와 화장실, 협문 및 연못 등이 갖추어져 있다.

[현황]

비안향교 소장 자료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8년에 『의성 향교지(義城鄕校誌)』가 발간될 당시까지 『유안(儒案)』, 『청금록(靑衿錄)』, 『장의안(掌議案)』, 『향안(鄕案)』 등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6년 일반 동산 문화재 다량 소장처 실태 조사 보고서(Ⅰ)』에 따르면, 현재는 고문서와 고서는 대부분 인멸되었고 「광풍루 중수기(光風樓重修記)」, 「비안 향교 중수기(比安鄕校重修記)」, 「교토 복구 전말기(校土復舊顚末記)」, 「문묘 중수기(文廟重修記)」 등의 현판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다행히 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던 자료는 1992년 영남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에서 편찬된 『경북 향교 자료 집성(慶北鄕校資料集成) Ⅲ』에 영인되어 일괄 수록되어 있다.

비안향교에서는 석전대제(釋奠大祭)가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교촌 농촌 체험 마을의 주도로 기로연도 행해지고 있다. 비안향교의 소유와 관리는 경상북도 향교 재단이 맡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교육적 기능이 상실된 향교 건축물의 경우, 동·서재가 없는 곳이 있는데, 비안향교가 이러한 예로 여겨진다. 동·서재는 없으나 제향에 관련된 건물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 조선 후기 향교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예로서 그 의미가 크다.

이용자 의견
이** 비안향교 변천내용중 "비안여지승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의성군지(1987년 발행) 131페이지 5번째줄에는 "비안현여지승람"(한자)으로 기록되어 있어 확인요함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은 의성군지가 인수되는대로 검토 후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8.20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