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67
한자 驛院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백지국

[정의]

조선 시대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설치·운영되었던 교통·통신 기관.

[개설]

역(驛)은 삼국 시대~조선 시대에 공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한 교통·통신 기관으로 우역(郵驛), 역관(驛館)이라고도 한다. 원(元)의 참적(站赤) 제도의 영향을 받아 참이 설치됨으로써 역참(驛站)으로 통용되었다.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그리고 공공 물자의 운송 등을 위해 설치되었다.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을 말한다. 교통 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전통 시대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사신 접대와 숙식을 제공했다. 지방에서는 기로연(耆老宴)을 실시하거나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굶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의성의 역원]

의성현은 안기도(安奇道) 관할 아래 있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보면 의성 지역의 역으로 청로역(靑路驛)와 철파역(鐵破驛)이 기록되어 있을 뿐 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청로역과 철파역은 고려 때부터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고려사』에 상주도(尙州道)의 속역(屬驛)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현의 동쪽에 윤곡원(尹谷院)·황산원(黃山院)·허어리원(許於里院), 서쪽에 도리원(都里院), 남쪽에 청로역·남원(南院)·염곡리원(廉谷里院)·승봉원(僧逢院)·건현원(件峴院)·빙산원(氷山院), 북쪽에 철파역·북원(北院)·이곡원(梨谷院) 등 2개의 역과 11개의 원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를 비롯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교남지(嶠南誌)』 등 조선 후기 자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지도서』의 경우 좀 더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철파역의 경우 역리(驛吏) 7인, 중마(中馬) 3필, 복마(卜馬) 2필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하며, 청로역의 경우 역리 24인, 대마(大馬) 2필, 중마 2필, 복마 6필이 있었다고 한다.

두 역의 이후 운영 상황은 1876년 간행된 『영남읍지』 안기역지(安奇驛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1870년 철파역의 경우 인정(人丁)이 178인, 노복 15구, 일수(日守)[지방의 각 관아나 역에서 잡무에 종사하던 서반 아전] 8명, 3등말 10필을 갖추고, 마위(馬位)[말을 사양하기 위한 위토]가 14결 91부, 복호(復戶)가 24결 35부 7속이 속해 있었으며, 목면 8필이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청로역은 인정 283인, 노 39구, 비 5구, 일수 2명, 3등말 11필을 갖추고, 마위 35결, 복호 58결 26부 1속이 속해 있었으며, 목면 20필이 들어왔다고 한다.

[비안의 역원]

비안현은 유곡도 승(幽谷道 丞)의 관할 아래 있었다.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비안현 지역에는 쌍계역(雙溪驛)[비옥역(比屋驛)]·안계역(安溪驛)[안정역(安貞驛)] 등 2개의 역이 기록되어 있고 원은 보이지 않는다. 쌍계역과 안계역은 고려 때부터 설치된 것으로 『고려사』에 상주도(尙州道)의 속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동쪽에 쌍계역·옥미원(玉彌院)·가차원(加次院), 서쪽에 흥계원(興係院), 북쪽에 안계역·저천원(楮川院)·장족원(長足院)·안계원(安溪院) 등 2개의 역과 6개의 원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단계에서는 가차원의 경우 이미 폐지되어 없는 상태이고, 안계역의 경우 역리가 36인, 대마 1필, 중마 2필, 복마 5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쌍계역의 경우 역리가 208인,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 5필, 노비 1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전하고 있다. 『경상도읍지』에는 안계역과 쌍계역만 보이고 원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교남지』에는 2개의 역과 6개의 원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1876년 간행된 『영남읍지』 유곡도역지(幽谷道驛誌)에는 역의 운영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안계역에는 마단(馬壇)[말을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마당(馬堂)이라고도 한다.] 1칸, 도장(都掌) 1인, 부장(副掌) 1명, 방호(防戶) 8명, 발졸(撥卒) 2명, 급주(急走) 6명, 상등말 1필, 중등말 2필, 하등말 2필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복호전(復戶田)이 16결 16부이고, 위전답(位田沓)은 817두락 내 233두락이 내가 되어 있고 실제 경작은 584두락이며, 객관은 없다고 한다. 쌍계역의 경우 마단 1간, 도장 1인, 부장 1명, 방호 48명, 발졸 2명, 급주 6명, 상등말 2필, 중등말 2필, 하등말 2필을 갖추고 있었으며, 복호전은 150결 3부 3속이고, 위전답은 966두락 내 133두락이 내가 되어 있고 실제 경작은 833두락이며, 객관은 없었다고 한다.

[단밀의 역원]

단밀현은 비안현과 마찬가지로 유곡도 승(幽谷道 丞)의 관할 아래 있었다. 상주의 속현이었던 단밀현의 경우 『경상도지리지』에는 역원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단밀현지(丹密縣誌)』에는 낙동역(洛東驛)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읍지』와 『상산지(商山誌)』에는 좀 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어, 낙동역에 대마 3필, 중마 2필, 복마 8필, 역리 490인, 노 35구, 비 13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낙동발참(洛東撥站)에 대한 기록도 등장한다. 1597년(선조 30)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파발(擺撥)을 두게 되었고, 또 변방의 소식을 중앙에 빨리 전달하기 위해 전국에 발참(撥站)을 증설하여 역과 구별했다. 이 제도에 따라 기발(騎撥)의 경우는 25리마다 1참을 설치하고, 참마다 발장(撥將) 1명, 군 5명, 기 5필을 두었다. 보발(步撥)은 30리마다 두었다. 낙동발참의 경우에도 보발이 배치되어 있었고, 장(將) 1인, 군(軍) 45명이 속해 있었다. 1876년 간행된 『영남읍지』의 유곡도역지를 보면 마단 1간, 도장이 1인, 부장이 1명, 방호가 28명, 발졸이 12명, 급주가 6명, 상등말 2필, 중등말 2필, 하등말 2필, 복호전 115결 91부 3속, 위전답 500두락 내 795두락이 있으며 객관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인의 역원]

다인현 역시 비안현이나 단밀현과 마찬가지로 유곡도 승(幽谷道丞)의 관할 아래 있었다. 다인현의 경우 『경상도지리지』에는 역원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에 수산역(守山驛)과 죽원(竹院)·광덕원(光德院)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원과 광덕원은 지금의 의성군 관할이고 수산역은 예천군 행정 구역에 해당한다.

[용궁의 역원]

용궁현 영역 중 현재 의성군 관할 지역에 있었던 역원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의성 지역에는 5개의 역[청로역·철파역·쌍계역·안계역·낙동역]과 하나의 참[낙동발참], 19개의 원[윤곡원·황산원·허어리원·도리원·남원·염곡리원·승봉원·건현원·빙산원·북원·이곡원·옥미원·가차원·흥계원·저천원·장족원·안계원·죽원·광덕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단밀현의 낙동역을 제외한 네 곳의 역은 고려 때부터 그 기록이 보인다. 원은 조선 시대 자료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역이 설치된 지역에 함께 설치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양자가 서로 관련된 시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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