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32
한자 古代
이칭/별칭 삼국 시대,원삼국 시대,고대 시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이형기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삼한 시대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召文國)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문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 기록을 통해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 2세기 이후 신라로 편입되었다.

[삼한 소국의 등장]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한반도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3세기 경상도 지역 상황은 변한·진한으로 구분되었으며, 각각 12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보다 많은 소국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주변 소국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한국 고대 사회는 이러한 소국들이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영역을 확대하고, 그 영역의 지배를 위해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기록으로 본 의성 지역 삼한 소국]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라고 하는 초기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기록된 이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서도 조문국을 의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의성의 읍지(邑誌)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고 밝혀 놓고 있어 조문국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조문국의 형성과 변천]

의성 지역 내 선사 유적의 분포는 크게 낙동강위천이 만나는 서부 지역과 동남쪽의 쌍계천 유역, 북부 미천 유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고인돌도 이 세 하천 유역 구릉에 성곽과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주변에 100여 기의 고분이 함께 분포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서는 이들 3곳의 고인돌 조성 집단이 소국 형성기의 대표적인 정치 집단으로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기록을 통해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탑리리, 대리리, 학미리 일대의 고총 고분을 남긴 세력 집단이 조문국으로 발전하였으며 의성 지역에서는 가장 두드러진 정치 집단이라 하겠다.

조문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금성면 일대의 고분군이 있다. 의성 지역 전역에 많은 고분군이 있으나, 금성면 일대의 고분들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규모가 월등히 크며 탑리리에는 봉분의 지경이 20m가 넘는 것이 16기나 되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르는 대형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이 중심 고분군이라 할 수 있겠다. 기록에 나타나는 조문국의 중심지와 문헌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탑리리 고분에서는 공작새의 날개 모양을 한 3개의 입식(立飾)을 가진 금동관도 발굴되어 이곳이 의성 지역 유력 지배층들의 분묘임을 알 수 있다.

2세기 말 국읍 중심의 내부 결합을 바탕으로 군대 조직을 재편한 사로국(斯盧國)은 구도(仇道)를 보내 조문국을 정벌하면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내용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이때의 정벌은 영토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거점의 확보나, 공납 의무 등 불완전한 지배 체제였을 것이다.

금성면 일대는 사방이 산지로 막힌 넓은 분지이며 동쪽으로 태백산맥이 뻗어 있고 그 지맥들로 인하여 북쪽의 경상북도 안동과 영주 지역, 남쪽의 영천 지역과 수십 ㎞ 이상 떨어진 고립지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특히 전조문국 경덕왕릉(傳召文國 景德王陵)이나 주변의 고총 고분에서 신라의 영향을 일부 받기도 하였지만, 독자적인 고분군이 축조되는 양상을 보아 그러한 추정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의성 지역이 조문국의 옛터이고 그 중심지가 금성면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 영역 범위는 시기와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문국이 실제로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을 통해 525년(법흥왕 12) 2월에는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 지역인 사벌주에 군주를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즈음 신라가 의성 주변의 통치권을 강화한 것을 보면 이때 조문국은 신라에 완전히 복속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문국은 신라에 의해 멸망 당한 후, 신라의 지방으로 편제되면서 조문군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경상남도 김해의 금관가야나 경상북도 고령의 대가야의 예를 통해 볼 때 신라는 국을 병합한 뒤, 그 국명을 지방 행정명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673년(문무왕 13) 9월에 조문성을 쌓았는데 이 이름은 당시 조문군의 명칭에서 붙인 것으로 추정되며, 김정호의 『대동지지』[1864]에 “조문국이 멸망하고 조문군이 되었다”고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6세기에 들어와서 514년(지증왕 15) 1월에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일대인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이는 이곳이 당시 아시혜현이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아시촌이 설치된 안계면 일대는 당시 의성 지역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이런 곳에 아시촌 소경이 설치된 이유로서는 이 지역의 유력한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경의 설치 대상지로 선정하고 왕경 6부와 남쪽 사람들을 채워 놓았던 것이다. 아마도 이 지역의 재지 세력과 마찰을 피하면서도 그들을 제압하고 나아가 중앙에서 직접 관장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곳이 상주나 영주 방면을 거쳐 소백산맥 이북으로 진출하는데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즉 신라는 아시촌을 의성 지역 재지 세력을 견제하면서 서북 지방을 통치하는 전략 거점으로 삼고 6부와 남쪽 지방민을 이주시켰던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의성]

통일 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 12월에는 당시 국왕권 중심 지배 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의 이름을 한식(漢式)으로 고치면서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다. 이때 의성의 조문군문소군이 되어 상주에 소속되었다. 문소군은 진보현(眞寶縣)[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비옥현(比屋縣)[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안현현(安賢縣)[지금의 안계면], 단밀현(單密縣)[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의 4개 현을 속현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 외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다인현은 상주의 직할 현이 되고,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일계현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고구현은 지금의 안동인 고창군에 영속되었다. 고려 시대 들어 의성의 중심지였던 의성부의성읍이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통일 신라기까지 의성의 중심지는 지금의 의성군 금성면 일대였다. 중심지가 금성면 일대에서 의성읍으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문군에서 문소군으로 개칭되면서 군치(郡治)가 옮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배** 사진 명칭 변경바랍니다.
조문국사적지-정식 명칭인 금성산 고분군
경덕왕릉- 전경덕왕릉
조문국 금동관-의성 탑리출토 금동관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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