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003
한자 壬辰倭亂-義城-女人-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창환

[개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구는 불과 열흘 남짓 만에 의성에 당도했다. 가히 파죽지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왜구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전을 치루면서 다져진 전투 경험과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갖춘 왜구 앞에 문치주의를 표방하며 오랜 평화기를 거친 조선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의 위기 앞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이 선비의 나라 조선이 보여준 기개였다.

의성의 건마산(乾馬山) 전투는 조선의 선비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출신의 김치중(金致中)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착실히 유학을 익힌 선비였다. 하지만 왜구의 침략 앞에서 그는 책상물림이 아니었다. 김치중은 격문을 돌려 청장년들을 규합하여 왜구에 맞섰다. 거기에는 친동생인 치화(致和)를 비롯해 사촌동생 치홍(致弘), 치강(致剛), 치공(致恭), 그리고 작은아버지 응주(應周)까지 가담하였다.

그들은 건마산 동북방의 가파른 절벽과 그 앞을 흐르는 미천강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왜구에 맞서 초기 전투에서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군사 숫자와 무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황은 왜구로 기울어져 갔다. 최후까지 싸우다 혼자 남은 김치중은 미천강이 흐르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임진왜란 에서 김치중과 같이 왜구에 맞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의성 사람은 부지기수다. 국천(國薦) 효자인 신원록(申元祿)의 아들인 신심(申伈)신흘(申仡)을 비롯해 김희(金喜), 김응하(金應夏), 박광춘(朴光春), 오득심(吳得心), 오계방(吳啓邦), 정몽열(丁夢說), 정호(鄭瑚)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항전에도 격퇴할 수 없었던 왜구들의 마수는 살아남아 있는 여인들에게로 뻗쳐왔다. 연약한 여인들은 간악한 이리 앞의 사슴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아비에 부끄럽지 않은 지어미로서의 결단을 통하여, 그들이 사는 곳을 왜 의성(義城), 즉 의로운 땅이라 부르는지 결연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의성 김씨(義城金氏) 문중의 여인들]

의성 중리(中里)[현 의성군 점곡면 사촌2리]는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기 위해 산림으로 은거한 의성 김씨 16대손인 김한동(金漢仝)에 의해 개척되었다. 그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 증손자인 응하(應夏), 응상(應商), 응주(應周) 삼형제가 병암서당(屛岩書堂)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고, 고손자인 치중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구에 맞서 싸웠다.

이렇듯 충의를 집안의 전통으로 이어온 의성 김씨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온 사람은 평산 신씨(平山申氏) 신구정(申九鼎)의 따님이었다. 그녀 또한 김씨 가문의 전통을 잇기에 모자람이 없는 여인이었다. 성품은 정숙하고 단아하며, 인자하고 지혜로워 시부모와 지아비를 섬기고, 일가친척을 건사하는 데 어긋남이 없었다.

신씨는 지아비 치중을 전장으로 떠나보내고 나서도 평상시처럼 태연히 집안일을 돌보았다. 하지만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치중을 따라갔던 하인 서석(徐石)이 헐레벌떡 대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신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하인이 내미는 서찰을 받는 신씨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구려.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했으니 선대의 남기신 가르침을 대하기가 참으로 부끄럽소. 내 태어나 어찌하여 당신과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이제 영결할 때에 이르렀구려. 부디 뒤를 부탁하오.”

지아비의 마지막 서신을 읽고 난 신씨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물을 훔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인에게 말했다.

“성현이 말씀하시기를 부부의 도는 한 몸이 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귀하고 천함도 함께하고 영광과 오욕도 같이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리라. 군자가 목숨을 버린 곳에 나아가 나 또한 뒤를 따를 것이니 함께 묻어주기를 부탁한다.”

신씨는 만류하는 하인의 손을 뿌리치고 남편이 최후를 마친 곳으로 갔다. 그 곳에는 아직도 처참했던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신씨는 잠시 둘러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용감히 싸운 남편의 모습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남편이 뛰어내린 절벽으로 나아가 몸을 날렸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의성 김씨 집안의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의병의 대장격인 김치중의 죽음은 곧 그를 따르던 세 명의 사촌동생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치중의 큰아버지인 김응하는 “죽음에 삶을 구하는 것은 한갓 대의를 그르칠 뿐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어 김응하의 며느리이자 치강의 처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이렇게 모두 순절해 버리면 우리 의성 김씨 가문의 이 장한 사실을 누가 후대에 전하며, 이 땅은 또한 누가 지킬 것인가!”라고 절규하며 계곡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의성 김씨 집안에서 내려오던 충의의 가풍은 그 집안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따르던 종복 또한 그 가풍을 이어갔다. 그래서 평산 신씨의 몸종인 복분(福分)과 김치중의 최후를 지켜봤던 하인 서석을 비롯해 10여 명의 하인들이 주인의 뒤를 따랐다. 이들의 죽음은 의성 김씨 집안이 평소에 어떤 가문이었는가를 말해주는 명확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용담(蟠龍潭)으로 뛰어든 여인 삼대]

의성을 침범한 왜구의 살육과 악행은 무자비하였다. 남자는 노소를 막론하고 죽임을 당했다. 남평 문씨(南平文氏)의 집성촌인 동동(東洞)[현 의성군 다인면 용곡1리]에 들이닥친 왜구 또한 소문과 다름이 없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먼저 눈에 띠는 남자를 무조건 살해했다. 남평 문씨 일가의 많은 남자들이 왜구의 손에 살해되었다. 이런 왜구의 만행에 죽어간 사람 가운데는 습독관(習讀官)을 지낸 문경제(文經濟)와 그 의 두 아들 문응주(文應周)와 문명주(文命周)가 있었다. 한 집안의 남자들이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한꺼번에 죽은 것이었다. 홀로 남게 된 여인들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언제 왜구가 들이닥쳐 그들을 욕보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명주의 딸 문경자(文慶子)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가장 어른인 문경제의 처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손녀인 문경자를 끌어안고 달래며 며느리 함양 여씨(咸陽呂氏)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는 이제 우리 여자들만 남았다. 필시 저 왜놈들이 곧 들이닥쳐 우리를 욕보일 것이나 더 이상 욕을 당할 수 없구나. 어멈아! 너는 어찌 할 테냐?”

며느리 여씨는 시어머니의 손을 힘껏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 또한 어머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서로의 뜻을 확인한 세 여인은 낙동강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반룡담(蟠龍潭) 언덕으로 달려갔다. 절벽에 부딪혀 휘감아 도는 물길은 그들을 삼킬 듯 흘렀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오직 살아서 원수에게 욕됨을 당할 수 없다는 의지를 확인하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훗날 대사헌 황섬(黃暹)은 이들의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양의 글을 지었다.

“환란을 만나 죽음을 마치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대장부도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일가의 세 부녀가 다투듯 뛰어내려 죽었도다. 여자로서의 절개와 지조를 지킨 세 여인 모두가 아름답구나. 이 같은 일은 옛적에도 흔한 일이 아니었노라.”

[박씨 세 모녀와 충견]

왜구가 휩쓸고 지나간 의성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집은 불타고 가구들은 마당에 내팽개쳐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치를 떨게 한 것은 마을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들이었다. 오래되어 부패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짐승들에 의해 훼손된 시신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토악질 참을 수 없게 하였다.

피난에서 돌아온 의성 사람들은 다시는 이런 비극을 당하지 않겠다는 듯 이를 악물고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그런데 장대마을에 사는 정태을(鄭太乙)의 집에 도달한 사람들은 이상한 광경에 목격하고 의아해했다. 거기에는 정씨의 아내 박씨와 두 딸, 그리고 뱃가죽이 말라붙어 죽은 개가 있었고, 그 시신들은 다른 것들과 달리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광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는 모두 말을 잃고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그 사정은 이러했다.

박씨 부인은 왜구들이 마을을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늦게 서야 듣고 부랴부랴 두 딸과 함께 서둘러 피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마을에 들어선 왜구들은 집을 나서는 박씨 부인과 그 딸들을 막아섰다. 그들은 세 모녀를 희롱하며 욕을 보이려고 했다. 다급해진 박씨 부인은 부엌으로 들어가 칼을 들고 나와 왜구에 맞섰다. 하지만 왜구는 겁을 먹기는커녕 더욱 재미있다는 듯 빙빙 돌며 모녀를 희롱하였다. 박씨 부인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들고 있던 칼로 먼저 두 딸을 찌르고 자신마저 찔렀다. 왜구는 박씨 부인의 예기치 않은 행동에 도망치듯 그곳을 달아났다. 그리고 기르던 개는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시신을 지켰다. 박씨 부인과 두 딸의 시신이 온전한 것은 개가 달려드는 짐승이며 까마귀들을 쫓아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관아에 알렸고, 의성 현령은 이를 가상히 여긴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세 모녀의 열녀비와 함께 주인의 시신을 온전히 지켜낸 충견의 비(碑)를 나란히 세웠다.

[죽음으로 되살아난 남양 홍씨]

조선 전역은 임진왜란으로 참담한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옛 선비들이 즐겨 말하던 “歲寒然後知松(세한연후지송)”이라는 말처럼 의성의 여인들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그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비안현여지승람(比安縣輿地勝覽)』에 나오는 김철(金喆)의 아내 남양 홍씨이다.

김철은 왜구를 피해 일가를 이끌고 깊은 산속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왜구와 맞닥트리게 되었다. 김철은 꼼짝없이 왜구의 포로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품고 있던 칼을 꺼내 왜구와 맞섰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왜구와 싸움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달아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가 왜구들과 대치하는 사이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윽고 김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혼자 남은 아내 홍씨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비를 명예로 삼으면서 어찌 왜놈의 포로가 될 수 있겠소!”

김철은 왜구를 마주보며 가지고 있던 칼로 자결하였다. 그러자 홍씨 부인 또한 이렇게 말하고는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당신께서 이미 열사가 되었는데, 첩만 유독 열사의 아내가 되지 못하겠습니까.”

두 사람이 흘린 피가 이내 땅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왜구들은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행동에 처음과 달리 오히려 겁을 먹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물러났다. 달아나던 사람들은 왜구가 추격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두 사람이 걱정되어 급히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 곳은 두 사람이 흘린 피로 흥건하였다. 사태가 다급한 것을 알고 한편으로 지혈을 하면서 상처를 감쌌다. 그러자 얼마 뒤 두 사람은 천우신조로 소생하였다.

현감 이노(李魯)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홍씨 부인에 대한 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서럽게 빛나는 별들]

우리에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가 많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가 이렇게 건재한 것은 고난 앞에 좌절하지 않고 의연한 기개를 보인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에서 보여준 의성 여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 김금숙은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서럽게 빛나는 별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시에서 이렇게 외쳤다.

그 이름들의 말라버린 눈물을 눈물로 닦으며/ 성스러운 경전이 된 이름들/ 이제 고이 잠들어야 하리/ 두 번 다시 그런/ 칼날 위에 그 별들 세우지 말아야 하리.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여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성 곳곳에는 이 여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점곡면 사촌리에는 의성 김씨 문중의 여인들의 기개를 알리는 김치중의 정려각이 있고, 다인면 용곡리에는 반룡담으로 뛰어든 세 부녀의 정렬비와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봉양면 장대리에는 정태을의 처 박씨와 두 딸의 열녀비와 그들의 시신을 지킨 충견의 의구비(義狗碑)가 있고, 비안면 서부리에는 김철의 처 남양 홍씨의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 비석들은 허물어지고, 그 글씨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우리가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은 어쩌면 마모되어 가는 이 자취들을 새롭게 가다듬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시청각 자료에는 의견비로 되어있고 [서럽게 빛나는 별들]에는 <봉양면 장대리에는 정태을의 처 박씨와 두 딸의 열녀비와 그들의 시신을 지킨 충견의 의구비(義狗碑)가 있고>
같은 말이지만 통일시켰으면합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08
이** [박씨 세 모녀와 충견]
박씨 부인과 둘 딸의 시신이 온전한 것은 개가 달려드는 짐승이며 까마귀들을 쫓아내었기 때문이었다. → 박씨 부인과 두 딸의 시신이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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