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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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에서 같은 본관의 성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 가음면은 북쪽의 비봉산을 비롯하여 동남부에 북두산·선암산 등이 솟아 산지가 많다. 면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쌍계천 유역에 평야가 발달했고 촌락도 주로 이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장리(長里)·이리(梨里)·양지리(陽地里)·가산리(佳山里)·귀천리(龜川里)·순호리(蓴湖里)·현리리(縣里里) 등 7개 법정리와 18개 행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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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과 관련한 1945년 이전 편찬 기록 자료와 서적.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고문헌과 관련된 곳은 조선 시대 경상도의 의성현(義城縣)과 비안현(比安縣), 상주목(尙州牧)의 속현(屬縣)인 단밀현(丹密縣), 예천군(醴泉郡)의 속현인 다인현(多仁縣), 그리고 용궁현(龍宮縣)의 일부가 해당된다. 고려 시대 이래 이들 지역의 토성(土姓) 세력 중에서도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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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의병이자 무관.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효숙(孝叔), 호는 옥간(玉澗). 증조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박경신(朴景信)이고. 할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박등(朴登)이고, 아버지는 우천(愚泉) 박장춘(朴長春)이고, 어머니는 정암(靖菴) 유습(柳隰)의 딸 문화 유씨(文化 柳氏)이다. 박무선(朴茂先)[1547~1629]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인 박장춘의 명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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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양. 자는 경서(景瑞). 호는 송파(松坡). 박대륜(朴大倫)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인 박장춘(朴長春)을 비롯해 많은 효자들이 배출되었다. 박상천(朴祥天)[1768~1823]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효성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9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상하게 할 지경이었다. 그 후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는데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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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학자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원백(元伯), 호는 우천(愚泉). 사직(司直) 박유부(朴有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박경신(朴景信)이고, 아버지는 박등(朴登)이며, 어머니는 김원호(金員琥)의 딸 월성 김씨(月城 金氏)이고, 부인은 유습(柳隰)의 딸 문화 유씨(文化 柳氏)이다. 박장춘(朴長春)[1523~1595]은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남달라 15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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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경(汝敬). 호는 모암(慕巖). 박진구(朴震龜)와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인 박장춘(朴長春)을 비롯해 많은 효자들을 배출하였다. 박하륜(朴河倫)[1748~1788]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21세에 진성 이씨(眞城 李氏)와 혼인을 하였는데 부인 또한 성품이 어질고 효성이 깊었다. 그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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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는 사적(史蹟)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등에 글을 새겨 놓은 것. 비(碑)는 기록한 재질에 따라 목비(木碑)·석비(石碑)·철비(鐵碑)로 구분되나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대부분 돌에 새긴 석비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비는 대부분 기념비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조상과 같은 특정 인물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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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현리리에 있던 조선 후기 사당. 옥천사(玉川祠)는 박장춘(朴長春)[1523~1595]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박장춘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원백(元伯), 호는 우천(愚泉)으로 명곡 서원(明谷 書院)[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금성현서로 553-9]에 제향 된 박성양(朴成陽)의 5대조다. 옥천사의 위치는 박장춘 유허비(朴長春 遺墟碑)를 통해 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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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신을 시조로 하고 박지량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의성군의 세거 성씨.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시조는 신라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박언신(朴彦信)으로 속함 대군(速咸大君)[속함은 경상남도 함양의 옛 명칭]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았다. 고려 시대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진 박선(朴善)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였다. 박선의 현손 박신유(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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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 출신이거나 의성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서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봉양한 자녀. 우리나라에서 효(孝)의 관념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널리 알려져 있는 화랑의 세속오계에서도 효를 강조하고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효녀 지은 설화에서도 고대에 효를 중시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국가에 의한 적극적인 교도(敎導)로 서민에게까지 이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