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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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貞一軒詩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명재 |
[정의]
1923년 간행된 충청남도 예산의 여류시인 정일헌 남씨의 시문집.
[개설]
『정일헌시집(貞一軒詩集)』은 정일헌(貞一軒) 남씨(南氏)[1840~1922] 사후 양자 성태영(成台永)이 어머니의 유고 시를 모아 1923년 간행한 책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아버지는 돈령도정(敦寧都正) 남세원(南世元)이며 남편은 성대호(成大鎬)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세 살 때 한글을 깨쳤다. 유교의 경사(經史)를 두루 학습하였으며, 바느질과 음식솜씨도 있었다. 정일헌 남씨는 16세에 예산의 성씨 집안으로 시집와 20세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을 여의고 슬픔을 견디지 못해 나뭇더미에 불을 붙여 분신하려 하였으나 시어머니가 구원하고 타일렀다. 이후 『주역』과 『시경』을 포함한 고전을 탐독하며, 도고산과 덕봉산 아래 있던 자신의 집을 도운각(道雲閣)이라 이름 짓고 정일헌(貞一軒)이라는 편액을 붙였다. 정일헌 편액의 ‘정일(貞一)’은 “사물의 변화는 무궁하나 그 이치는 하나로 돌아간다.”라는 『주역』의 한 구절을 딴 것이다. 이에 남씨의 호가 ‘정일헌’이 되었다.
정일헌 남씨는 가정사를 돌보는 일 외에 시 짓기에 열중하여 많은 작품을 썼다. 그러던 1894년 11월, 간양리 앞에서는 북접 동학군과 관군의 관작리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정일헌은 피난을 하면서 자신의 일부 원고를 불태웠다 한다. 이후 남아 있는 원고를 모아 1896년 경 시문집을 간행하고자 조선 말기의 학자 이건창(李建昌)의 서문까지 받아두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지적 상황]
1권 1책의 새활자본[명조체]이다. 아들 성태영의 「선고비합장묘지」문을 부록으로 한 판본이다.
[구성/내용]
『정일헌시집』에는 총 57편의 시와 1편의 제문, 5편의 부록이 실렸다. 책 앞에는 이건창의 서문을 싣고 책 뒤에는 이건승(李建昇)의 발문을 실었다.
작품의 내용은 ‘가족 간의 정, 고향마을의 산천경개와 회포, 철학적 사유’를 골자로 하고 있다. 친정 부모에 대한 그리움, 시댁 가족 사이에 나눈 정, 31세에 맞이한 양아들 성태영에 대한 모정이 나타나 있다. 예산 간양리 마을을 감싼 산천의 경치와 사계절을 노래한 춘·하·추·동(春·夏·秋·冬)과 한식, 삼짇날, 초파일 등 절기에 관한 것 등 일상생활과 식견을 엿볼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또한 성리학적 내용을 담은 유학적 사유와 주역의 세계를 그리는 철학적 내용도 있다.
[의의와 평가]
16세에 시집와 죽을 때까지 계속 살았기에 정일헌 남씨는 예산읍 간양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집을 도운각이라 한 것은 간양리 뒤편에 우뚝한 ‘도고산(道高山)의 구름이 머무는 집’이란 뜻이다. 『정일헌시집』에는 간양리 주변의 풍광과 회포를 그린 작품이 많고, 천지만물과 이기(理氣)의 학문적 영역을 다룬 시편이 실려 있어 고향 마을에 대한 정과 학문의 경지를 가늠케 한다. 정일헌 남씨는 생전에 유학적 가훈을 중시하고 실천하였다. 정일헌 남씨의 가훈적 모습은 여러 작품에 녹아들어 특별한 시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학문과 글짓기는 양반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이에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나 여류 문집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역설적으로 문집을 남긴 여류 문인들은 그만큼 문재가 뛰어났고, 작품성이 크게 뛰어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정일헌시집』도 이와 같아 작품성이 높으며, 개인의 서정에 치우쳤던 일반 여류 문인의 작품과 달리 유학과 주역을 아우르는 철학적 사유를 시적으로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일헌시집』은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 이후 예산의 문맥을 잇는 시문집이며, 아울러 한국 여류문학의 일맥을 이루는 시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