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면 귀곡리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바미 또는 율리(栗里)라고 부른 데서 갈신리(葛申里)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 대흥군(大興郡) 근동면(近東面)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갈신리(上葛申里)와 하갈신리(下葛申里)를 병합하고, 갈신리라 하여 예산군 대흥면에 편입되었다. 서부 및 동부에 100m 내외의 구릉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에서 지냈던 마을 제의. 귀곡리 서낭제는 신양면 귀곡리 마을 사람 중 ‘습실댁’이라고 불리던 무당이 주도하여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며 음력으로 정월에 지냈던 마을 제의이다. 일반적인 서낭제가 동제 형태를 띤 마을 공동체 의식이었던 반면에, 귀곡리 서낭제는 무당이라는 한 개인이 주도하고,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을 주...
-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발견된 철이나 청동 등의 쇠붙이나 돌에 기록한 글씨나 그림. 금석문은 보통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뜻하며, 넓게는 나무·토기·그릇·직물·전돌·기와 등에 기록된 문자를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금석문 기록은 역사 연구에 있어 고문서 등의 기록과 함께 특히 주목되는 자료이다. 즉, 금석문의 기록을 통해 지역의 지명·인물·유적과 유물의 연대 및 건립...
-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발견된 철이나 청동 등의 쇠붙이나 돌에 기록한 글씨나 그림. 금석문은 보통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뜻하며, 넓게는 나무·토기·그릇·직물·전돌·기와 등에 기록된 문자를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금석문 기록은 역사 연구에 있어 고문서 등의 기록과 함께 특히 주목되는 자료이다. 즉, 금석문의 기록을 통해 지역의 지명·인물·유적과 유물의 연대 및 건립...
-
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녹색 농촌 체험과 휴양을 할 수 있는 마을. 녹색 농촌 체험 마을은 도시민의 입장에서는 농촌의 자연경관, 친환경농업, 전통문화 등을 소재로 하여 휴양할 수 있는 곳이고, 촌락민의 입장에서는 도시민에게 휴양 기능을 제공하여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곳이다. 예산군청은 2005년에 신양면 귀곡리의 해바라기마을, 대술면 상항리의 꽃피는 갈막마을...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시대에 대흥군(大興郡) 근동면(近東面) 지역일 때 바미 또는 율리(栗里)라 부른 데서 대률리(大栗里)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흥군 근동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송림리(上松林里)와 하송림리(下松林里)를 병합하고, 대률리라 하여 예산군 대흥면에 편입되었다. 대률리 대부분의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화천리에 있는 대술면의 행정 사무를 맡아 보는 기관. 대술면행정복지센터는 예산군청에 속한 행정기관이며, 대술면민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가족관계 등록·주민등록 업무, 민원서류 발급, 리·반 조직 운영 등 지방행정의 기초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예산군 대술면의 행정, 민원 및 주민의 복리증진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기 위하여 설...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시대에 예산군 술곡면(述谷面) 지역일 때 산직집이 있으므로 산직말(山直말)이라 불렀고, 산직말이 변하여 산정말(山亭말)이라 부른 데서 산정리 지명이 유래되었다. 본래 예산군 술곡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요동(料洞), 죽곡리(竹谷里), 신리(新里)를 병합하고, 산정리라 하여 예산군 대술면에 편입되었...
-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강선원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예산의 세거 성씨.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고구려 때 병마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삼는다. 강이식은 598년(영양왕 9) 병마도원수로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 지방에 출정해 공을 세웠고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맞아 임유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진주강씨가 진주에 세거한...
-
성인보를 시조로 하고 성흔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예산의 세거 성씨.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중윤을 역임했던 성인보(成仁輔)이다. 호장부정을 지낸 성숙창(成淑昌)의 아들이다. 당나라의 학사 성경(成鏡)이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정착하였는데, 성경의 후손이 번성하여 창녕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창녕성씨는 고려 때 성공필(成公弼)과 성한필(成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