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E010101 |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정현 |
1896년 2월 돌산군이 설치되고 1897년 5월 여수군이 설치되었는데, 이 지역은 모두 순천부에 속해 있었다. 순천부에 속해 있을 당시 여수 방면의 도로는 순천부에서 여수 방향 16㎞ 지점에 성생원[율촌면 소재], 24㎞ 지점에 무상원[쌍봉역], 32㎞ 지점에 내례원[국동 지역]이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3개의 역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여수에는 세 갈래의 간선도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간선도로는 오늘날 차가 다닐 정도의 도로가 아니라 우마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소로에 불과한 것이었다. 순천부의 외곽 지역에 속하고 있었던 여수반도는 순천부와 통하는 도로망이 그리 발달하지 못하였다.
여수는 조선시대에 순천부 관할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천과의 교류보다는 수군 기지인 전라좌수영의 본영과 좌수영 예하 수군 부대인 진이 돌산과 고흥에 설치되어 있었던 관계로 이들 사이를 해로를 통해 왕래하였다. 돌산군과 여수군이 설치된 이후에도 육로보다는 해로를 통한 왕래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여수 지역 내에서 여수읍과 각 면과의 왕래가 해로를 통해서 많이 이루어졌고 타 지역과의 왕래에도 완도-고흥-여수-광양-남해-충무로 이어지는 해로가 이용되었다.
여수반도의 가운데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덕양마을은 여전히 해로든 육로든 간에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마을에 속했다. 그러나 이곳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도로 개설과 통신망 확충을 서둘렀다. 소위 치도(治道) 10개년 계획을 세워 전국적으로 군과 군 사이에 도로 개설에 나서서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 9월 여수에서 순천까지 연장 31.4㎞, 폭 5m의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이 신작로가 덕양마을을 관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지마을에 도로가 개설됨으로써 덕양마을에는 일본으로부터 개화 문물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내륙 오지의 조그마한 마을이던 덕양마을은 여수-순천 방면의 경유지가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도로가 개통되자 여수에 영업용 자동차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927년 김한승이 자동차 2대를 마련하여 여수-덕양-순천 간을 운행하였다. 당시 덕양에 자동차가 들어온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신작로가 개설된 지 20여 년이 지난 1932년 10월에는 화양면 방면으로 가는 재가 개통되었고 이어서 화양면 나진리와 덕양에서 12㎞ 지점인 화동리까지 개통되었다. 1945년 해방 후 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화양면 세포에까지 도로가 개설되었다. 이 도로가 국가지원지방도 22호선이며, 현재 왕복 2차선이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인하여 덕양은 여수·순천·화양 3개 방면으로 오고 가는 육상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3개의 방면에서 오고 가는 차량이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가게 되고 여수국가산업단지로 오고 가는 대형 차량 등의 교통량이 폭증하게 되자 1977년 순천에서 여수공항을 지나 덕양 입구에서 쌍봉의 여천초등학교 앞까지 우회도로가 개설되었는데 이 도로가 지금의 국도 17호선이다. 오늘날에도 국도 17호선이 덕양마을을 우회하고 있지만 고속버스와 직통버스를 제외한 모든 일반버스는 반드시 덕양을 경유하고 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지방도 22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