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C020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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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종길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마을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에 좌수영 휘하에 있던 5관5포 가운데 하나인 방답진(防踏鎭)으로, 첨사(僉使)가 지키는 수군 전진 기지였다. 임진왜란 때 방답진첨사는 이순신(李純信)[1554~1611]이었는데, 그를 중심으로 편성된 방답함대 군사들이 세웠던 공로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1592년 5월 제1차 격돌시에 이순신(李純信)은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을 직접 호위하는 중위장으로서 방답함대를 이끌고 경상도 거제도 쪽으로 나아가 옥포해전에서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 서전을 장식하여 아군의 사기를 북돋았고, 이어 합포해전에서도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했고, 적진포해전에서도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6월 제2차 출동시에는 첨사 이순신이 전부장이 되어 사천해전에서 왜선 1척을 소각하고, 당항포해전에서는 구도의 정운 함대와 합력하여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하여 왜군 약 100명을 사살하고 익사케 했다. 7월 제3차 충돌시에는 한산해전에서 왜대선 1척을 나포하고 왜선 2척을 격파 소각함과 아울러 적병 4명을 사살했다. 8월말 9월초에 걸친 제4차 출동시에는 부산해전에서 부산항으로 돌격하여 들어가 다대한 전과를 올리었는데, 개별적인 전과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음이 아쉽다.
이순신 첨사의 이후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방답진첨사 후 충청도수사를 거쳐 고령진첨사로 좌천되어 1년여를 있다가 유도방위대장, 전주부윤, 전라병사로 재직하였다. 1598년(선조 31) 경상우수사로 재직하게 되어 노량해전에 참전하고 통제사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게 되자 수군을 지휘하여 개선하였다.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임시통제사로 임명하자 그 역할을 수행한다. 노량해전이 끝난 후 남해에서 왜적에게 동조한 자들을 색출하여 그 수장을 처형 효수하는 등 전쟁 후의 어수선한 백성들의 기강을 바로 잡는다.
이순신은 전쟁 후 12년 이상을 고위 무관직에 있었다. 포도대장으로 재직하다 무고한 사람을 장살하였다 하여 파직되며, 1600년(선조 33)에 충청도수사에 이어 1601년 황해도병사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그 해 9월 수원부사로 임용되었으나 또 파직되었다. 1602년 경상우병사를 거쳐, 그 해 12월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나 또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을 당하는 등 여러 번에 걸쳐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604년(선조 37) 2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6월에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완산군에 봉해졌다. 1606년 수원부사와 경기도병사로 있을 때 다시 완천군으로 봉해졌다. 1610년(광해군 2)에 전라병사를 지냈다. 인조 때에 좌찬성이 추증되었다.
1998년 5월 21일 우리나라 일곱 번째 국산 잠수함이 진수되었는데 ‘이순신함(李純信艦)’으로 명명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방답진첨절제사로 있으면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막하 중위장으로 큰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순신함은 1200톤급 디젤 잠수함으로, 수중 최대 속력은 시속 44㎞이며, 어뢰와 기뢰 등을 장착하고 2개월간의 단독 작전이 가능하다. 이 함의 승선 인원은 40명이다. 한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이름은 차후 한국형 구축함(KDX-Ⅲ)에 명명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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