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B01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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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길 |
뽁쥐굴은 박쥐굴의 거문도 방언이다. 서도리의 북쪽 바다로 돌출된 사슴뿔을 닮은 녹산 해변에 있는 동굴로 해안의 큰 바위와 바위들이 엉키면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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뽁쥐굴
거문도 팔경 중 하나인 ‘녹문노조(鹿門怒潮)’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녹산 지역을 서도리 사람들은 ‘녹쌔이’라고 한다. 녹쌔이 북쪽 해안에는 집채만한 크기의 바위들이 비슷비슷한 모양으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이곳 지형을 잘 아는 사람도 뽁쥐굴의 위치를 쉽게 찾지 못한다.
굴 입구는 사람 한 사람이 몸을 비집고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좁은 바위틈이다. 하지만 동굴 안은 사람 수십 명이 들어갈 만한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뽁쥐굴은 서도리 사람들의 숨겨진 피난처로 전해 온다. 멀리는 임진왜란부터 동학농민운동 때에도 전쟁을 피하려던 사람들이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다고 한다.
1976년 9월 거문도에는 남파간첩이던 김용규가 함께 남파되었던 간첩을 사살하고 자수한 거문도 간첩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서도리에는 고정간첩 김재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의 딸을 월북시키는 임무 등이 주 임무였다. 서도리 출신이던 김재민은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동생이 해방 전부터 북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분단 이후에 북한의 고위관료가 되었다고 알려진 집안이었다. 그러나 김재민의 딸이 월북을 동의하지 않았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위기감에 함께 내려온 이들을 사살하고 자수를 하였던 것이다. 이때에도 서도리 해안으로 침투하였던 간첩들은 주간에는 뽁쥐굴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거문도 간첩사건이 일어나자 남해안 일대의 섬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우선 간첩이 은거할 만한 동굴을 찾아 입구를 막아버리는 일들이 진행되었다. 광도와 평도의 큰굴, 화양면 소장리의 용굴, 초도의 해안 동굴, 거문도 동도의 큰 굴에는 이때 입구를 시멘트로 봉하거나 큰 돌을 날라다 메워 버리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주로 향토예비군을 동원하였다. 이 밖에도 서도리 덕촌의 ‘무넹이’마을과 ‘신추’마을, ‘짚은개’마을이 간첩이 은거할 장소를 제공할 만한 마을이라 하여 덕촌마을로 이주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도리의 뽁쥐굴도 이시기에 입구를 바윗돌로 막아 버렸다가 지금은 입구의 돌들이 치워져 있다. 동굴 안은 거친 파도에 부유하던 스티로폼 공들이 파도에 휩쓸리면서 동굴 아래쪽으로 밀려들어와 동굴 하단부를 반이나 막아 버렸다. 옛날에는 호기심 많은 서도리마을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많아서 뽁쥐굴은 숨바꼭질이나 전쟁놀이의 놀이터가 되었지만, 지금은 찾는 사람이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의 존재도 잊혀 버리지 않겠냐는 염려를, 안내를 해준 이대춘[73]의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