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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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麗水 竹林里 車洞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313-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병호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8년 7월 31일 -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 발굴 조사 착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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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313-1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광주박물관 -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110 |
성격 | 유적 |
면적 | 21,493㎡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차동마을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의 고분 유적.
[개설]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가야계 토광묘, 가야계 석곽묘, 백제 석곽묘, 고려 석곽묘, 백제 와관묘, 조선 시대 토광묘 등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7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여수 죽림 택지개발 사업지구에 대하여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죽림리 차동 유물산포지와 차동 패총을 확인하였다. 차동 유물산포지에 대한 택지개발 계획이 수립되자 대한주택공사 광주전남지역본부에서는 2007년 2월 6일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허가 제2007-89호, 면적 4만 6114㎡, 조사 일수 30일] 그달 23일 마한문화연구원과 발굴 조사 용역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경작 협의 및 소유권 이전이 늦어지는 등 발굴 조사 현장의 업무 처리가 완료되지 않아 착수하지 못하고 2007년 3월 21일 발굴 조사를 중지하였다. 이후 현장 업무가 완료되어 2008년 1월 7일부터 7월 31일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위치]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차동마을 일원에 있다.
[형태]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9기, 가야계 토광묘 8기, 가야계 석곽묘 13기, 백제 석곽묘 22기, 고려 석곽묘 8기, 백제 와관묘 1기, 조선 토광묘 1기가 조사되었다.
청동기 시대 묘역식 고인돌은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 1지구 가장 낮은 지역에 조성되어 있다. 묘역은 모두 4곳이며, 묘역 형태는 장방형[1·2호], 세장방형[4호], 원형[3호]으로 묘역 상부에서는 묘실이 확인되지 않았다. 묘역 시설의 규모가 작고 묘역 내에 하나의 묘실만 안치하며, 묘실의 굴광을 이단으로 굴착하여 묘실 깊이가 깊어지며 선행하여 축조되는 것이 확인된다. 이후 차츰 묘역이 커지면서 하나의 묘역 안에 다수의 묘실을 안치하고, 지표면에서 낮은 깊이의 묘실이 후행하여 축조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물은 1호 고인돌에서 출토된 석촉은 무경 편평형 석촉이고, 4호 묘역 주변에서 수습된 석촉은 유경식 석촉으로 1호가 더 이른 시기로 파악되며, 4호 묘역에서는 삼각형 석도도 함께 수습되어 1호에 비해 시기적으로 늦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인돌의 축조 순서는 1호, 2호, 4호의 순서로 상정된다.
가야계 토광묘는 총 8기가 조사되었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며, 장축 방향은 모두 등고선과 나란한 북동-남서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보면 크게 3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는 눈썹형 구가 있는 6호와 장경 소호가 출토된 3호가 해당되며 4세기 후엽으로 편년된다. 2단계는 1호와 5호가 해당되며 5세기 전반으로 편년된다. 3단계는 1지구 1호와 2지구의 1-1호, 2호, 4호가 해당하며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초반으로 편년된다. 여기에서는 도자형 철촉과 역자형 철촉 등 철기류의 부장이 많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석곽묘는 가야계 석곽묘, 백제 석곽묘, 고려 석곽묘로 구분된다. 가야계 석곽묘와 백제 석곽묘는 입지, 장축 방향, 석곽의 평면 형태, 축조 방법, 바닥의 형태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석곽묘는 축조 유형과 출토 유물에 따라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가야계 석곽묘가 축조되는 단계로 5세기 중후반에 해당된다. 이들 석곽묘는 모두 2지구에만 분포하고 있다. 이전 시기부터 사용되던 토광묘가 계속 사용되면서 석곽묘가 함께 축조되는 단계로 토광묘 단계에서 서서히 석곽묘 단계로 변화되어 간 것으로 판단된다.
2단계는 가야계 석곽묘가 축조되나 부장되는 유물 가운데 일부 백제 요소를 가진 토기가 나타나는 단계로 5세기 말엽에서 6세기 초반에 해당된다. 이들 석곽묘는 장축 방향과 구조로 미루어 가야계 석곽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부장된 토기에서 백제계 요소가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한편 2지구 10호 석곽묘는 장축 방향이 여타의 가야계 석곽묘와 달리 등고선과 직교하여 백제 석곽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구조와 축조 방법, 출토 유물 등의 여러 요소들이 서로 혼재된 점으로 미루어 가야계 석곽묘에서 백제계 석곽묘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판단된다. 2지구 10호 석곽묘에서는 판갑을 비롯한 철촉, 철부 등 다량의 철기와 신라·가야계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2지구 10호 석곽묘가 죽림리 고분 가운데서 가장 상위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석곽묘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크게 가야계와 재지계로 분류되나 전형적인 가야계 유물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가야와 백제의 토기 제작 기법이 혼용되어 제작된 재지계 토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3단계는 가야계 석곽묘가 소멸되고 백제 석곽묘가 축조되는 단계로 6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해당된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변형 토기로 구연이 훼손되어 있어 부장 시 일정한 의례 행위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가야계 석곽묘와 백제 석곽묘는 입지, 축조 기법과 출토 유물, 분포 상태 등을 고려해 볼 때 서로 다른 집단이 아니고 동일한 집단에 의해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축조된 고분군으로 판단된다.
고려 석곽묘는 총 8기로 백제 석곽묘보다 낮은 위치에 분포하고 있다. 출토 유물로 보아 연대는 12세기로 파악된다.
가야계 고분은 시기적으로 3지구의 주거지 집단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3지구에서는 주거지 내에서 가야계 토기가 다수 확인되며, 가야계 유물만 출토되는 주거지도 확인되고 있다. 연대가 약 5세기 후반대로 편년되어어 1·2지구 가야계 고분 축조 집단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2지구 주거지가 가야계 토광묘가 축조되기 시작하는 시기부터 더 이상 축조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거주지가 이동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분군과 약간 떨어진 3지구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1·2지구 주거지와 관련된 무덤, 백제 고분과 관련된 주거지는 확인되지 않아 시기별 주거지와 무덤과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은 발굴 조사 후 택지로 조성되었다.
[의의와 평가]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은 유적과 유물의 시기와 형태가 다양하여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여수 지역의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