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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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景埰 |
영어공식명칭 | Ryu Kyung Chai |
이칭/별칭 | 편정(片丁),유경채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길 |
출생 시기/일시 | 1920년 10월 5일 - 류경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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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9년 - 류경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통령상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류경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무감사 특선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 류경채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55년 - 류경채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류경채 창작미술협회 회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86년 - 류경채 정년퇴직 |
몰년 시기/일시 | 1995년 12월 29일 - 류경채 사망 |
출생지 | 여수군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 |
묘소 | 천주교도봉동묘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173다길 18-20[도봉동 산66-9] |
성격 | 화가|교육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서울대학교 교수 |
[정의]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화가이자 교육자.
[개설]
류경채(柳景埰)는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서양화가로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 교수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류경채는 1920년 전라남도 여수군 돌산면 평사리[현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의 빈농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돌산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자 고향 마을 류씨 문중에서 등록금을 마련해 주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938년 전주사범학교 2학년 재학 중 선만학생미전(鮮滿學生美展)에 입선하였고, 다음 해에는 특선을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학생 신분으로 1940년 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선(船)」이 입선하였고, 1941년 일본 녹음사화학교(綠陰社畵學校)를 졸업하였다. 1946년 경기공립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폐림지 근방」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6·25전쟁 중 류경채는 대구사범학교와 진해여자고등학교, 서울사범학교 교사와 서울대학교 강사 등을 하며 생활하였다. 1953년 서울이 수복된 후 개최된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뒷산」이 무감사 특선을 수상하였고, 연이어 제3회와 제4회 출품한 작품이 특선으로 입상하여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가 되었다. 195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 작가가 되었으며, 1960년 제9회부터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화가 류경채의 삶에서 또 하나 큰 축을 이룬 것은 교편생활이었다. 1955년~196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61년 서울대학교로 옮겨 1986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서양화과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7년 1월 류경채는 보수나 급진에 치우치지 않고 순수한 제작 활동에 전념할 것을 표방했던 창작미술협회 창립에 가담하였다. 이봉상(李鳳商)이 주도하여 결성됐던 창작미술협회는 류경채를 비롯해 최영림(崔榮林), 장리석(張利錫), 황유엽(黃瑜燁), 이준(李俊), 고화흠(高和欽), 박항섭(朴恒燮), 박창돈(朴昌敦) 등 중견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류경채는 1960년 창작미술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는데, 이때부터 각종 단체전과 해외 전시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였다. 작업에서는 1960년 이전 류경채의 작품에서 나타나던 구상적인 요소들이 사라지고 서정적인 추상 회화를 모색해 나갔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기하학적이고 단순화된 추상화로 작업의 범위를 넓혔다.
류경채는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났으나 황해도 해주나 서울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아버지의 고향이 황해도였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이후 고향을 등지고 살다가 어머니가 사망하여 다녀간 기록이 한 번 있다. 이렇게 고향을 멀리했던 이유를 가까운 친척들은 화가로 성공한 형님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동생들 때문이었다고 말하였다.
1979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87년에는 예술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86년 서울대학교를 퇴임한 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시 활동을 계속했는데, 1995년 사망하던 해에도 싱가포르의 아세아 국제전에 출품했을 정도로 쉬지 않고 일생을 작품 활동에 정진하였다.
[저술 및 작품]
광복 이후 「폐림지 근방」[1949], 「상량의 날」[1968], 「초복」[1974], 「날」[1985] 등의 작품을 남겼다.
[묘소]
류경채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173다길 18-20[도봉동 산66-9]의 천주교도봉동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류경채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통령상, 1957년 서울시 문화상, 197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5년 3·1문화상, 1992년 제1회 오지호 미술상, 1995년 금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