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3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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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愍祠重修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2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병호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조선시대 사우의 중수 내력을 기록한 글.
[개설]
충민사를 중수해야 하는 당위성과 충민사를 여수에 세우게 된 연유와 이순신과 안홍국을 배향한 이유 그리고 부정(副正) 호암 박대복의 공이 지대함에도 충민사에 배향하지 못한 이유와 박대복의 가문의 충절과 영호남의 향원을 동원하여 충민사를 중수하는데 앞장을 선 충의와 효열을 기록한 글이다.
[제작 발급 경위]
순천부(府)의 남쪽이며 좌수영(營)의 북에 사당이 있으니 이 충무공이 철향하는 곳인데, 사당이 오래됨에 따라 원무(院廡)가 퇴쇄하고 또 경오회록(庚午回綠)의 재화를 지내니 향중(鄕中)으로부터 수리하되 환아함에 급할 새 겨우 묘우(廟宇)만 수리하였다가 담장 곧 헐어지니 긍구(肯構)의 책임을 맡아 영호(領湖)에 발섭(跋涉)하여 약간 재물을 모아 향원 문간과 계비(階肥) 장원(牆垣)을 면면히 새로 수리하여 자기 선조 신창(新創)의 뜻을 계승하고 오늘날 수선의 공을 담당하여 수고로움과 부지런함이 가상히 여겨 중수기를 쓰게 되었다.
[구성/내용]
부(府)의 남, 영(營)의 북에 사당이 있으니 이 충무공이 철향하는 곳이다. 단청 유묘(遺廟)가 옛날 한승상의 사당과 송문사의 사당과 같으니 옛적 남구의 변에 공이 주사로서 홀로 대난을 항거타가 정유에 이르러 두 번째 번명을 받아 13신집(新集)의 배로 백만패해의 도적을 당적하고 다시 큰 공을 세워 위로는 방록(邦綠) 무강(無彊)한데 전하고 아래로는 억조를 이제까지 편안케 하니 당당하고 늠름한 충절은 가히 천지에 드러나고 일월에 빛난지라 오성이공이 그 일을 나타내 그 비를 새기니 공손히 생각컨데 우리 정묘에 특히 공의행장과 또 난중록을 편집하고 이름하여 충무전서라 하여 활판소에 부쳐 본사에 저장해 놓고 국승(國乘)과 야사에 아울러 그 실상을 나타냈으니 나 같은 천멸한 사람이 어찌 감히 다시 그 사이에 보태오리오.
그러나 사우의 처음 창립함과 중세에 화환과 수집함이 혹 오래됨에 증거 없을까 두려워 감히 이룬바 있노라. 대개 호좌수영은 곧 공의를 세운 땅인즉 마땅히 사당을 여기에 세워 당세를 장려하고 내후(來後)를 권케 할지다. 이제 오성공의 체찰사 때에 왕명을 이어받아 사당을 세우고 이수사, 안보성(安寶城) 두공으로서 배향하니 대개 그와 함께 순절함을 취함이다.
부정(副正) 호암 박대복은 하루 앞서 예교(曳僑)의전에 죽으니 이 문경공 락촌(駱村)의 손자이다. 동시의 순절로서 정충(貞忠)과 대의(大義)를 일찍 같이 배향치 못한 것은 혹 그 아들 첨사. 미당공(美堂公) 신충(藎忠)이 주장하여 창설한 바 스스로 아들로서 애비를 위한 일에 혐의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미당공이 삼도(三道)에 발문하여 재물을 모아 창건한 사적이 상량을 부파하여 중수한 날에 나타나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기다림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또한 병자에 당하여 의병장으로서 중도에 구성함을 듣고 물에 던져 죽었으니 그 발자취를 이어 몸이 죽은 것이 진실로 속히 방책에 배포되었거늘 또한 민몰(泯沒)하여 전함이 없으니 가석한지라 이로 조차 써옴으로 조가(朝家)의 신칙(申飭)과 사손(祀孫)의 보조와 영읍의 비호와 사림(士林)의 승봉함이 이에 심히 심한지라. 그러나 성상(星霜)이 여러번 고치매 원무(院廡)가 퇴쇄하고 또 경오회록(庚午回綠)의 재화를 지내니 향중(鄕中)으로부터 수리하되 환아함에 급할 새 겨우 묘우(廟宇)만 수리하였다가 담장 곧 헐어지니 긍구(肯構)의 책임을 맡아 영호(領湖)에 발섭(跋涉)하여 약간 재물을 모아 향원 문간과 계비(階肥) 장원(牆垣)을 면면히 새로 수리하여 자기 선조 신창(新創)의 뜻을 계승하고 오늘날 수선의 공을 담당하여 수고로움과 부지런함이 가상하도다.
슬프다, 천환(天煥)의 일문 내에 충의와 효열(孝烈)이 대대로 이 아름다움을 이어 윤상(倫常)을 일세에 붙잡고 풍성을 백대에 심음이 이 할아버지가 있으며, 이 손자가 있다함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