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3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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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軍爆擊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호 |
성격 | 미공군에 의한 민간인 폭격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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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50년 8월 |
발생(시작)장소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
관련인물/단체 | 여수시 남면 주민과 피난민 |
[정의]
6.25전쟁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에서 미군폭격으로 발생한 양민학살사건.
[개설]
6.25전쟁 당시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상에서 미국 공군 전폭기에 의해서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으로서 아직까지 종결이 되지 않은 사건이다.
[역사적배경]
1950년 8월 3일 미군의 불법적인 안도리 폭격의 희생자들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부산에서 남해안 도서로 소개되어 피난민 배에 탑승 중인 민간인이었다.
[경과]
사건을 겪은 이춘송씨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8월 3일 아침, 아버지는 육지에 나가셔서 손수 밥을 지어 오신 밥을 마른 멸치에 먹었다. 오랜만에 하얀 쌀밥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는 그날 따라 옷을 갈아 입으셨다. 나는 물었다. “왜 배에서 옷을 갈아입어요?” “그냥 입고 싶구나” 하시면서 손을 내미신다. 손에 낀 은반지가 까맣게 변해 있었다. 이상한 일이라 하셨다. 1950년 8월 3일경(음력 6월 21일), 아마도 이날은 어머니 생일이었던 같다. 아침밥을 먹고 나니 시간은 9시경이 되었다. 이때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가 들려온다. 호기심 많던 나는 재빨리 배 앞쪽을 보았다. 쌕쌕이 비행기가 일개 편대 4대가 오고 있었다. 신기해서 바라보니 처음 총 두발을 발사 한 후 연속 배를 돌면서 폭격을 가해 온다. 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믿었던 비행기가 우리를 향해 총을 쏠 줄이야. 나는 그때 체하여서 어느 선생님이 주신 까만 알약을 먹고 배 윗칸 뒤편 환자실에서 어머니와 같이 있었다. 옆에는 물통이 있고 총알은 비오듯 쏟아 졌다. 물통 뒤에서 앞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총탄에 맞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7-8명씩 배 안으로 또 바다로 쓰러지고 피는 한강을 이루고 저쪽을 보니 살아서 바다로 몸을 던지는 사람 등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선장실 뒤 선원실에 뛰어 들어 가니 어느 소녀가 두 손을 잡고 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같이 꿇어 앉아서 하나님 아버지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외쳤다. 그리고 다시 배 뒤로 돌아오니 어머니, 누나, 형이 있었다. 형은 어머니에게 윗도리를 벗어주고 바다로 뛰어든다. 나도 “나갈래” 하니까 “너는 나가다 죽어” 안 된다고 하신다. 또 폭격이 시작된다. 물통 뒤에 숨어서 앞을 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이 죽어 쓰러져 간다. 그때 나는 등에 가득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누가 오줌을 싸는가 보다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옆을 보니 나에게 약을 주신 선생님이 볼과 팔에 총상을 입고 배 난간에 기대여 쓰러져 있었다. 팔에는 수건으로 지혈을 하고 눈은 위로 올라가 흰자위가 많이 보인다. 뒤를 보니 어느 아주머니가 흰옷을 입은 채 눈을 치켜뜨고 죽어 있었다. 배에 있는 보따리에 불이 났다. 어머니와 누나는 당황했다. 이제 우리는 불에 타 죽는구나 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당황하여 남동생을 업고 배에서 뛰어 내려서 배의 줄을 잡고 계시는데 나의 동생은 바다 물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동생의 대한 애처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형용할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이 엇갈린 시점에서 애타는 마음을.... 그때 구명배가 들어와서 어머니는 마침 그 배에 타신 것을 보고 너무 좋았다. 배는 많은 사람이 타고 육지로 노를 저어 나간다. 배 뒤에 누나와 나 둘이 있는데, 17~8세 되는 사람이 엉덩이에 살이 다 떨어져 나가고 피를 말할 수 없이 흘린 채로 배 위 계단에서 뚜벅뚜벅 내려온다. 그때 나의 생각에는 ‘얼마 안 가서 죽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또 배한 척이 왔다. 누나가 뛰어내리면서 나더러 내리라고 한다. 나는 배가 너무 높아서 무서웠다. 누나는 여기 있으면 죽는다고 외쳤다. 나는 할 수 없이 뛰어 내렸다. 많은 사람을 태우고 동쪽으로 가로질러 나간다. 가는 도중 내 옷을 보니 온 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총에 맞은 것은 없는데 “웬 피야” 하고 옷을 벗어 바닷물에 빨아도 피는 지워지지 않는다. 배가 자갈밭에 닿자 언덕 위 수수밭에 형과 누나 셋이서 숨어 들어갔다. 배에는 우리나라 태극기가 달려 있었는데 왜 미군이 우리에게 사격을 하나 의아해 했다. 나는 당시 12살, 형은 15살, 누나는 18살이었다. 배를 탈출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총사격을 하고 그 튕기는 물살이 마치 분수대 같이 튀어 올라서 나의 옷을 다 적셨다. 피난민이란 것을 다 알면서 이렇게 해야 하나 비행기는 100m 높이도 안 되게 떠서 육안으로 바라보아도 흰옷 입은 피난민임을 알았을 것인데도 사격을 가해왔다. 적은 배에 너무 많이 탄 피난민들의 배에는 분명 태극기가 달려있고 배에서 적대행위를 한 것도 없었다. 그때에 나의 아버지는 선장실 앞에서 바로 총탄을 맞고 누이동생과 같이 비명을 지르고 물을 달라면서 바다로 쓰러졌다고 친구 분한테서 저녁에야 들었다. 수수밭에 같이 숨어있던 한 청년은 손바닥에 총알이 박혀서 살은 뒤집어 지고 벌건 살만 밖으로 나오고 피는 안 났다. 형은 배가 도착할 때 자갈에 마중 나와 있었다. 누나는 형을 보고 어머니를 찾으러 나가라고 했다. 형이 나간지 5분도 안되어 울면서 왔다. 그때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고 그 맑은 햇살도 간 곳 없고 모든 세상이 캄캄한 어둠이 깔린 밤같이 보였다. 올 것이 왔구나 직감으로 느껴졌다. 아! 이제 어두운 이 세상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절망과 두려움이 나의 앞으로 다가 온다. 자갈밭에 나가서 달려가 보니 어머니는 입에서 거품을 물고 돌아가시고 동생 춘기는 집 뒤 나무단 위에 상반신이 시퍼렇게 되어 죽어 있었다. 나는 동생을 안고 어머니 옆에 누이고 담요로 덮어 주었다. 많은 사람이 작은 배에 타고 나오다 배는 전복된 것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맨발로 산 속을 헤매며 아버지를 부르면서 어둠이 깃들 무렵까지 찾아 헤맸다. 바닷가에 주저앉아 배만 바라보고 넋나간 사람마냥 앉아 있으니까 청년 몇 명이 다가와서 “시체를 섬에 묻으면 죽인다”고 해서 죽일 까봐 어린 마음에 어머니와 동생의 시체는 바라만 보아야 했었다. 이때 아버지 친구 되신 분이 다가와서 너의 아버지, 동생은 총탄을 맞아 “물 물” 소리를 지르며 바다에 빠져 버렸다고 하셨다. 너무나 갑자기 당한 일이라, 울기조차 힘들었다. 그저 눈물도 없이 엉엉 울기만 하고 있다가 저녁 어둠이 깔릴 무렵, 형은 세 사람이 같이 줄을 잡고 짐을 가지러 배에 들어가서 총 맞은 냄비 1개, 흐트러진 쌀자루, 짐 보따리를 챙기고 배 안을 보니 올라오는 계단 앞에는 40~50구의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이고 그 중에 아주머니가 죽어있는데 어린아이는 젖을 빨며 울고 있는 아이를 아이의 아버지가 데리고 나왔다. 시체 앞에는 피가 정말 한강을 이루고 시체를 밟고 넘어가서 짐을 찾아와야만 했던 그 끔직한 사건들이 눈을 감기 전에는 어찌 잊으리요. 부모님과 동생의 옷은 같은 피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우리 것만 챙겨 가지고 동쪽 산속에 숨어서 배가 보이는 곳에 있었다. 너무 무섭고 배는 우리 가까이 자꾸 다가오는 것만 같고 서로가 부둥켜안고 소리도 못 내고 밤새 울기만 했었다. 다음날 아침 짐을 지고 서쪽 산으로 옮기면서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 곳을 바라보면서 지나 산기슭에 올라갈 때에 형은 여러번 앞으로 넘어지고 또 넘어지곤 했다. 오솔길을 따라서 우리 키가 조금 넘는 소나무 숲으로 숨어서 가지를 꺾어다 위를 가리고, 자리를 잡았다. 나와 형은 나뭇가지를 주어오고 누나는 산 넘어 어촌에 들어가서 간장과 된장을 얻어 처음 죽을 써서 먹었다. 돈이라곤 없기 때문에 누나는 세이코 시계를 2,000원에 팔아서 담치[자연산 홍합]를 사다 죽을 써먹으니 참 맛이 좋았다. 수저가 없어서 큰 담치 껍데기로 한 10일을 먹었다.
증언자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 1동 몰운대 아파트 116동 1504호 / (051) 263-7816
이춘송
이 사건의 증인
• 유영구(남, 70세) : (061)666-8442
• 강우신(여) : (061)665-9488 / 부친이 소라를 잡다 제트기가 폭격하자 바위굴에 숨어 있어 살았다고 진술함
• 장원웅(남, 60세) : (061)665-9450 : 선박에 태극기 매단 것을 증언
• 유영구 남 70세 (061) 666-8442
• 강우신 여 (061) 665-9488
• 권말지 여 (061) 665-9448
• 이사연 여 (061) 666-9547
• 하돌수 남 (061) 665-9388
• 장원웅 남 (061) 665-9450
• 황만옥 여 (061) 665-9377
[결과]
다음은 이 사건에 대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문의 내용이다
1. 진실규명 사건
가. 이 사건으로 인한 전체 희생자는 밝혀낼 수 없었으나 진실규명대상자 중 희생사실이 확인이 된 사람은 총 10명이다. 이중 여수시 남면 안도리 폭격사건의 희생자는 이신만 등 5명이고, 여수시 남면 두룩여 해상 폭격사건의 희생자는 강영현 등 5명이다. 안도리 폭격의 희생자들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부산에서 남해안 도서로 소개되어 피난민 배에 탑승 중인 민간인이었고, 두룩여 해상 폭격의 희생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거주지 인근 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었다.
나. 두 사건 모두 목격자들의 진술과 사건 발생 당시의 일반적인 공중폭격정책을 검토해 볼 때 가해 폭격기는 미군 소속 전폭기로 추정되나, 사건과 관련된 직접적인 폭격기록이나 관련문서의 부족으로 가해 주체를 특정할 수 없었다.
다. 이러한 희생이 발생하게 된 것은 미군과 한국 군경이 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급하게 퇴각한 후 이 지역 해상에서 적의 활동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폭격을 실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군은 공중폭격 시 적절한 민간인 보호 조치, 민간인과 인민군을 구별하려는 노력 등 관련 국제법 규정을 충분히 수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2. 진실규명 사건(권고사항)
미국과의 협상, 국가 사과와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부상 피해자에 대한 의료 지원, 제적부·가족관계등록부 등의 정정할 것을 권고하였다.
[의의와 평가]
전선이 형성되지 않은 곳에서 미군의 일방적인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문에서 볼 수 있듯이 조사 자체가 지극히 피상적이고 소극적으로 사건 자체를 국가의 조사에 의해 축소되고 말았다.
피해자들의 가족들 역시 정부의 홍보 부족과 억울함을 탄원할 방법이나 절차를 모르고 있어 60년 동안 한을 풀어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이 사건과 같은 국가 권력에 의해 대량으로 민간인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재발되지 않고 피해자 가족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수 있도록 정부가 앞장서서 구체적인 사건 규명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