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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금리 적금 동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269
한자 積金里積金洞祭
영어의미역 Village-Ritual Ceremony of Jeokgeum Village, Jeokgeum-ri
이칭/별칭 당산제,당제,산제,용왕제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적금리 적금마을
집필자 나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신앙|마을신앙
의례시기/일시 당산제는 음력 정월 열 나흗날 19시|용왕제는 음력 정월 열 다셋날 12시
의례장소 큰당산 당집|작은당산 당집
신당/신체 큰당산(당집)|작은당산(당집)|용왕(선착장)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적금리 적금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한 해의 무사고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적금리 적금 동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부터 15일까지 주민 모두가 합심하여 정성으로 지내는 마을 제의이다. 이를 ‘당산제’, ‘당제’, ‘산제’ 모신다고 한다. 당산제는 예전에는 정월 초하룻날 자정에 모셨으나 지금은 정월 열 나흗날 저녁 7시에 모시러 올라가서 밤 8시에 내려온다.

설날에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들이 많아 10여 년 전에 마을회의를 통해 변경하였다. 지금은 당주가 제를 모시고 바로 내려오나 예전에는 아침이 되어서야 마을에 내려왔다. 제일과 제시는 예전에 하던 방식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제를 앞두고 주민들 가운데 누가 출산하거나 초상이 나더라도 제는 그대로 모신다. 다만 출산하기 전에 다른 마을로 옮겨가야 한다. 그리고 초상이 나면 제 모시기 전에 속결로 처리하기 때문에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 제를 모시기로 결정한 뒤에 마을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매장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당주는 큰 마을 당주 1명, 작은 마을 당주 1명을 뽑는다. 당주는 제 모시기 보름 전이나 한 달 전에 결정하는데, 근래에는 섣달에 대략 이야기하고 정초에 결정한다.

2007년에는 정월 초나흗날에 주민들이 리사무소에 모여서 당주를 선정하였다. 당주로 뽑히면 그날부터 근신하며 여러 가지 행동과 언행을 조심한다. 또한 제를 앞두고 몸을 정갈히 하는데, 소변·대변을 보아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렇게 당주는 1년간을 근신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2008년 큰 마을 당주는 권형우[남, 62], 작은 마을의 당주는 제용필[남, 62]이었다.

제비는 대략 70~80만원이 소요되는데, 제 모신 뒤에 주민들을 위한 음식비용까지 포함한 금액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집집마다 거출하여 마련한다. 2007년에는 1만 5천원을 걷었으며, 부족한 금액은 마을 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한다. 마을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제비를 낸다. 만약 제비를 내지 않으면 마을 이권에서 제외되어 불이익을 당하므로 당연히 낼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마을은 당제를 모신 뒤에 정월 초이튿날 도제를 모셨다고 한다. 도제는 큰너메의 ‘도제바탈’이라는 곳에서 이 마을에 사는 무당이 와서 직접 제를 모셨다. 제를 모신 뒤에는 소대가리를 ‘갱물’에 묻었다고 한다. 도제는 해마다 모시다가 대략 50년 전부터 모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당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원 및 변천]

적금리 적금 동제를 언제부터 모시게 되었는지 주민들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조상 대대로 해오던 방식에 따라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한동안 제를 모시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당시 제를 2년간 모시지 않았더니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죽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제를 모시지 않기 때문에 이런 불길한 일이 생긴다 하여 3년째 되던 해인 1972년 쯤 다시 제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당제는 당집, 제당에서 모시는데 이 마을은 당집이 두 곳이다. 섬 우측에 위치한 마을이 큰 마을인데, 이 마을의 산 중턱에 당집이 위치해 있다. 이 당집을 ‘큰 당산’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을 모신다고 한다. 그리고 섬 좌측에 위치한 마을이 작은 마을인데, 이 마을의 산 위에 당집이 위치해 있다. 이 당집을 ‘작은 당산’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할아버지 한 분만을 모신다.

큰 마을의 당집은 한 칸 규모의 시멘트 건물로 철제문이 정문에 달려 있다. 당집의 지붕은 원래 슬레이트 지붕이었으나 작년에 함석으로 개량했다. 당집 좌측으로 예전에 쓰던 절구가 있고, 그 옆으로 흙무더기가 있는데, 당주가 제를 모신 뒤에 이곳에 헌식한다. 당집 주변은 소나무와 팽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그 일대는 숲이 제법 울창하다. 당집 문 위에는 올해 제 모시기 전에 쳐 놓은 금줄이 그대로 있다. 예전부터 당집 안에 그림이 걸려 있지는 않았다.

작은 마을의 당집은 큰 마을 당집과 마찬가지로 한 칸 규모의 시멘트 건물로 철제문이 정문에 달려 있다. 당집 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이었으나 작년에 함석으로 개량했다. 당집 내부 역시 큰당산과 마찬가지로 가운데에 칸막이를 세워서 양쪽의 공간을 구분하였다. 오른쪽 칸은 제물을 진설하는 곳으로, 제물을 진설할 수 있는 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왼쪽 칸은 제물을 장만하는 곳으로 한쪽 구석에 밥을 할 수 있는 아궁이를 만들어 놓았다. 작은 당집 역시 큰 마을 당집과 같이 제기를 보관하였으나 지금은 리사무소에 보관해 두고 있다.

[절차]

제 모시는 시간에 앞서 이장은 당주가 제를 모시러 당집에 올라가니 문밖출입을 삼가줄 것을 미리 방송한다. 주민들은 리사무소에 모여 굿을 간단히 친다. 제의 시간이 되면 큰 마을 당주와 작은 마을 당주는 리사무소에 보관된 제물과 제기를 가지러 간다. 큰 마을 당주는 제물을 가지고 부인과 함께 큰 마을 당집으로 향하고, 작은 마을 당주는 혼자서 제물을 들고 작은 마을 당집으로 향한다. 각각 동시에 제를 모시러 당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당주는 당집에 도착하여 제단에 위패를 먼저 놓는데, 큰 당산의 위패는 ‘큰당산할아버지’라 적고, 작은 당산의 위패는 ‘작은당산할아버지’라 한글로 적는다. 그리고 위패 앞으로 명태포, 생쌀을 진설한다. 생쌀은 그릇에 담아서 올리는데, 큰 마을 당집에서는 생쌀 두 그릇, 작은 마을 당집에서 생쌀 한 그릇을 올린다. 제주는 청주를 올린다. 예전에는 메, 누룩, 백시루를 올렸는데, 당주가 당집에 올라가 직접 제물을 장만하여 진설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생쌀을 올리고 있다.

제물이 진설되면 당주는 나아가 제배한다. 제배는 세 번을 한 뒤에 이어서 위패를 소지한다. 예전부터 축문은 읽지 않았다고 한다. 소지 뒤에는 제물을 싸서 당집 옆에 위치한 흙무더기를 호미로 파서 제물을 넣고 큰 돌을 그 위에 덮는다. 큰 마을 당집에서는 두 곳에 헌식을 하고, 작은 마을 당집에서는 한 곳에 헌식한다. 그래서 큰 마을 당집에는 흙무더기가 두 곳이고, 작은 마을 당집에서는 흙무더기가 한 곳이다.

제를 모신 다음날인 정월 보름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리사무소에 모여 굿을 치기 시작한다. 예전에 정월 초하룻날 제를 모실 때는 다음날 새벽 5시경에 굿치는 사람들이 올라가 굿을 치고 당주와 함께 내려왔다고 한다. 마을에 12당산이 있어 당산마다 모두 굿을 쳤으나 지금은 여덟 군데만 굿을 치면서 마을을 돈다. 당산의 명칭은 예전부터 따로 없이 누구네 집 앞이라 부른다. 이렇게 굿을 계속 치다가 작은 당산에 이르러 굿을 치고 난 후 그해 제를 모신 당주집에 들러 굿을 쳐준다.

그리고 이어서 용왕제를 모신 다음 용왕굿을 치고 마지막으로 날당산을 치면 모든 굿이 끝난다. 굿은 그해에 따라 오후까지 치기도 하는데, 보통 점심 무렵에 끝이 난다. 용왕제는 마을 선착장 뒤쪽으로 고흥군이 바로 보이는 해안가에서 모신다. 이곳을 ‘몰락기미’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이 작은 당산굿을 치고 이곳에 도착하면 바다에서 죽은 가족을 둔 주민이 제물을 한상 가득 차려서 가지고 나온다. 그래서 예전에는 여러 상이 바다를 향해 일렬로 진열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주민이 상을 가지고 나온 것은 아니다. 지금은 제를 올리고 싶은 사람이 상을 차려 가지고 나오는데, 2007년에는 한 상만 가지고 나왔다. 용왕굿을 친 뒤에 진설된 제물을 음복하며 날당산굿을 치러 간다.

[부대행사]

적금마을은 지금도 당굿을 치고 있다. 당굿은 제를 모시기 전에 간단히 치고, 제를 모신 다음날인 정월 보름날에 본격적으로 친다. 보름날 주민들은 리사무소에 모여 굿을 치기 시작하여 마을 곳곳에 위치한 당산에 치러 다닌다.

예전에는 12당산을 쳤으나 지금은 큰 당산, 큰 당산 너머에 당산, 큰 마을 선창 너머에 있는 갯가, 은석이집, 강구집, 작은 당산, 용왕굿, 날당산 등 여덟 군데에서 굿을 친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굿을 치다가 중간에 당주집에 들러 굿을 쳐준다. 굿은 그해에 따라 오후까지 치기도 하는데, 보통 점심 무렵에 끝이 난다.

적금마을은 풍물로 화정면대회에 출전한 전력이 있다. 마을의 상쇠는 신철우[남, 85]에서 권필선[남, 71]으로 이어졌는데, 이 분들이 연로하여 곧 명맥이 끊길 것 같아 권필선이 신민우[남, 48]를 10여 일간 직접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은 신민우가 상쇠가 되어 당굿을 이어가고 있다.

마당밟이는 용왕굿을 친 뒤에 했으나 10여 년 전부터 하지 않는다. 지금도 원하는 집이 있으면 마당밟이를 해주나 예전과 같지 않다. 예전부터 적금마을은 줄다리기를 하지 않았지만, 학교 운동회 때 주민들 모두가 모여 줄다리기를 하곤 한다.

[참고문헌]
  • 인터뷰(적금리 적금마을 주민 신용구, 남, 79세, 2007. 6. 28)
  • 인터뷰(적금리 적금마을 주민 홍주순, 남, 62세, 2007. 6. 28)
  • 인터뷰(적금리 적금마을 이장 박종오, 남, 57세, 2007.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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