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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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羅道順天府靈鷲山興國寺事蹟木板 |
영어의미역 | History of Heungguk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진옥 |
성격 | 불교경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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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일시 | 1691년 |
제작지역 | 흥국사 |
재질 | 나무 |
길이 | 25.6㎝ |
너비 | 44.8㎝ |
소장처 | 흥국사 |
소장처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
소유자 | 흥국사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영취산에 있는 조선 후기 흥국사의 사적기.
[개설]
1691년 통일대사가 대웅전 등을 중창하면서 불일 보조국사가 흥국사를 창설한 내력을 기록한 사적기이다.
[형태]
나무로 된 두 장의 목판으로 앞뒷면에 글씨를 양각한 경판 형식이다. 이 경판은 1691년 승려 통일이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창사 이래 흥국사의 중요한 자취를 목판에 새긴 것이다. 목판은 전후면에 각 1장씩 판각되어 총 2판 4장이 온전히 전한다.
목판은 마구리 없이 가로로 긴 장방형으로 전체 크기는 세로 28.0㎝, 가로 80.8㎝에 이른다. 판면의 광곽은 사주쌍변에 유계이고 광곽의 크기는 세로 25.6㎝, 가로 44.8㎝이다. 반곽의 행자수는 각각 8행 14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판심부의 어미는 상하하향이엽화문의 형태이며 판심제 없이 정차만 기록하였다. 세부적인 판각 관련 기록은 없다. 목판은 별다른 충해나 균열, 글자 손상이 없어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이전의 자료에는 5장이라고 되었으나 2015년 문화재청의 조사자료에 4장으로 조사되었다. 간기에 ‘강희삼십년양월기망서(康熙三十年陽月旣望書)’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691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디지털대전 자료에 간기가 ‘강희사십칠년순천영취산흥국사간판(康熙四十七年順天靈鷲山興國寺刊板)’이라고 적혀 있다. 는 것과 5장이라는 것으로 보아 1장은 다른 경판의 판을 잘못 삽입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계특대사가 사적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 계특대사가 흥국사 홍교 축조를 했다는 자료로 미루어 1639년 즈음에 주지로 있었는데 1708년이라는 자료로 보아도 나머지 1장은 다른 경판을 착오로 삽입한 듯하다.
[구성/내용]
"승평부 동쪽 영취산 흥국사는 불일 보조국사가 창건한 이름난 사찰이다. 국사에 관한 기록은 송광사의 국사비문에 나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흥국사의 옛기록을 살펴보니 옛날 송나라 영종 즉위 다음 해인 경원 2년, 대금 승안 1년에 국사께서 국리민복을 위하고 정과 혜를 닦을 가람의 터를 택해서 수선도량을 창설하려고 하였다. 산을 답사하고 산맥을 찾기 위해 금오도를 내왕하다가 굴봉산에 올라 풀을 깔고 앉으니, 알 수 없는 노승이 나타나 국사를 금성대로 안내하여 영취산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설명하였다. “여러 봉우리가 빼어나고 무게 있고 곧게 뻗었으며 숲이 번성하고 지세가 깨끗해서 덕이 높고 용의 양 귀처럼 생긴 좋은 환경이므로 진실로 고승대덕이 주석할 수 있는 대도량이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주변을 돌아보다가 다시 앉아 “이곳에서 내려가면 절묘하고 빼어난 터가 있는데, 하늘이 아끼고 땅이 보호하여 불법이 크게 일어나는 도량이 될 것이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흥국사라고 하라. 이 절이 흥하면 나라도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이 절도 잘될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국사가 조용히 생각하여 성인이 나타나 오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의 말을 높이 믿었다. 신인이 가르쳐 준 장소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지형이 용이 꿈틀거리고 파도가 용솟음치며 구름이 둘러싼 듯하였다. 멀리 바라보니 봉우리마다 상서로운 기운이 서리고 가까이 바라보니 계곡마다 수려하였다. 참으로 불법이 크게 일어날 장소였다. 또한 별자리와 태양의 움직임이 봉우리를 따라 순응하므로 국사의 뜻이 매우 흡족하였다. 찬탄하여 말하기를, 세간 사람들은 금은보화를 귀하다고 지니지만 영취산은 천지만물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머금고 있도다.
날짐승도 나무를 가려서 앉거늘 내 어찌 이곳에 풀과 나무를 베어내고 절을 짓지 않으리오. 이에 법당과 요사를 지어 넣으니 가히 기타림의 기원정사를 방불케 하고 인도 영취산의 성불도량과 일치하여 참으로 빛나고 장중하도다. 이는 흥국의 비보이며 나라의 보배이다. 그러나 아쉽고 애절한 일이지만 머무르는 산마다 주인이 다르고 인연이 다르므로 국사는 흥국사를 떠나 조계산 송광사로 가게 되었다. 때는 송나라 가태 즉위년 대금 태화 원년이었다.
국사가 떠난 뒤로 흥국사는 승려가 줄어들고 사찰이 차츰 피폐되어 백년 가까이 토굴과 같이 지냈다. 그러다가 몽고군에게 다시 불태워지고 초동들의 놀이터로 그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대지의 큰 법맥은 영원히 단절되지 아니함에 명나라 가정 39년 경신에 법수대사가 동지인 학중·신잠·수인·양희·영우 등의 무리와 함께 뜻을 합하여 흥국사 재건에 선심원력을 냈다. 또한 창건의 뜻을 받들어 법당과 요사를 복원하여 원정(圓頂)이 방과 방을 이었으므로 많은 수행승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도반들이 시장같이 모여드니, 나라에서 최고요 3천의 비보사찰 가운데 으뜸이었다.
때에는 성쇠가 있고 물질은 일어남과 없어짐이 있음이라. 임진과 정유재란 때 벽이 허물어지고 기와가 무너짐에 따라 장엄하고 빼어났던 법당과 요사들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모아놓은 상주집물들은 하나도 남지 않아 빈 산에 달만 오락가락하고 냇물만 흘러갔다. 하지만 큰 운은 순환하고 대지의 정기는 불멸하니 흥국사의 부흥대운이 마침내 돌아왔다.
본사의 승려였던 계특이 어릴 때 삭발하고 항상 산을 찾아 정진하고 여러 선지식을 찾아 참구하여 인정받더니, 옛 산으로 돌아와 보고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해는 저물고 다음 해인 천계 4년 갑자년 가을에 법당을 중건하고 도반인 희·익·언과 더블어 모든 선방 및 요사들을 일신해서 재건하고 수시로 모든 당우와 범종을 주조하니, 부처님 당시 기원정사의 향기가 감도는 듯 영취산의 상서로운 기운이 더욱 무르익는 듯하였다. 법수대사가 보조국사가 흥국사를 창건한 뜻을 이으니, 묵묵히 국사의 뜻과 합한 바가 있어 전법전통의 행적이 더욱 빛났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대웅전이 좁아 여러 유지들이나 대중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대웅전 확장 불사를 요청하므로 이러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상주대중들은 오랫동안 병이 날 정도로 가슴이 아픈 세월을 보냈다. 이때 흥국사 승려 통일이 법당 확장 불사에 신심을 내고 원력을 세워 명산을 찾아 몇 년 간의 기도정진을 회향하고 돌아와서 사방으로 화주하고 모연을 시작하니, 이는 총림의 큰 그릇이며 승가의 빼어난 준걸이었다. 사람을 대할 때마다 담대하니 그 한 마디 말에 누구든 흔쾌히 굴복하고 희사하였다.
강희 29년 경오년 봄에 사부대중과 일체 화합하여 법당을 중창 개조하였다. 명실공히 낮음에서 높음으로, 작음에서 틈으로, 좁음에서 넓음으로 마천의 큰 전각을 완성하되 해를 넘기지 않고 낙성을 하니 실로 이 불사는 하늘이 도와주는 듯하여 보는 이마다 경탄하였다.
통일대사는 보조국사의 뜻을 받들어 정혜쌍수와 선교양전의 방침 위에서 사찰을 운영하고 납자를 제접하니, 옛과 지금이 같아 아름다운 풍속과 전통이 더욱 빛났다. 신남신녀들이 다시 몸과 마음을 기울여 팔상전 재건을 열망하므로 옛 재목을 모으고 잘 이용하여 팔상전을 준공하니 이른바 부처님 당시의 나원에 못지 않았다. 양 전각을 함께 건설하여 동시에 참배하니, 마치 나팔과 퉁소가 서로 상응하여 선의로 다투는 듯하였다.
회고하니, 참으로 기이하도다. 이 절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일어남이 진실로 나라와 함께 하였음이…
강희 30년 10월 10일에 기록하다."
[특징]
경판으로서는 매우 두꺼우며 사주쌍변이 반엽 8행 14자의 형태이다. 사적 내용에 흥국사의 창건 연기와 함께 비보 사찰임을 기록하고 있다. 보조국사가 송광사 이전에 터를 잡았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후반부에는 사찰의 중창을 중심으로 한 주요한 이력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