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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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乳兒服 |
영어의미역 | Baby Clothes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위은하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젖먹이가 생후 1년 내외에 입는 옷.
[개설]
유아복은 출생 후 처음 입는 배냇저고리와 백일옷, 돌옷으로 나뉜다. 보통 입고 벗기에 편리한 형태여야 하고,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이 넉넉하고 편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또한 피부가 약한 아이들을 위하여 가급적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드는데, 잠을 자거나 누워 있는 시간이 많으므로 누워 있을 때 솔기에 눌리지 않도록 솔기를 적게 하거나 겉으로 나오게 제작하기도 한다. 옷감은 흡습성이 좋은 소재를 사용하며, 색은 희거나 연하고, 세탁에 강한 질기고 실용적인 감으로 제작한다.
[출산 준비물]
일반적으로 임신한 지 7개월이 지나면 출산 준비물을 마련하기 시작하며, 대부분은 산달 바로 전달에 준비가 끝난다. 여수 지역 산모들은 예전부터 일반적으로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는 배냇저고리를 비롯하여 두렁치마, 좁쌀베개, 쌀포대기(강보), 포대기(이불), 깔포대기(요), 기저귀, 처네 등을 준비하는데, 아기를 업을 때 사용하는 처네는 아이가 태어난 후에 친정이나 친척들이 선물로 보내기도 한다.
포대기류로는 쌀포대기·포대기·깔포대기(깔보단)·좁쌀베개 등을 준비하며, 가정 형편에 따라 사용하는 소재나 개수가 달랐다. 무명천과 무명솜으로 만드는 쌀포대기는, 환경이 바뀐 아기에게 충격을 덜어 주고 바람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아기의 몸을 꼭 싸준 다음 끈으로 묶는다. 현재에도 속싸개·겉싸개의 이름으로 쌀포대기를 이용하는데, 고운 면직물을 이용하며, 끈이나 단추 등으로 여밀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요즈음은 포대기 속에 들어가는 솜도 합성섬유 솜으로 바뀌었다.
바닥에 까는 요인 깔포대기는 주로 고운 무명천으로 만드는데, 솜을 넉넉히 두어 푹신하게 만들었다. 형편이 나은 집안에서는 굵은 명주로 세 개 정도를 장만하여 3층으로 깔아 주거나 젖을 때마다 갈아 주었다고 한다. 형편이 되지 않으면 깔포대기를 이용하지 않고 덮는 포대기만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
덮어 주는 아기 이불인 포대기는 무명이나 명주로 만드는데, 속에 덮는 것과 겉에 덮는 것이 있었다. 위에 덮는 포대기는 솜을 넉넉히 두고 3㎝ 정도로 누비고, 속에 덮는 포대기는 솜을 얇게 두고 2㎝ 정도로 누벼서 만들었다. 1960년대 여수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아온 김진희[67세, 여수시 미평동]는 출산 준비물로 배냇저고리(이레안 옷이라고도 불렀다), 좁쌀베개, 쌀포대기(강보), 포대기(이불), 깔포대기(요), 가제기저귀 등을 준비했다고 한다.
아기를 업을 때 사용하는 처네(처녀 보닥지라고 부르기도 함)는 후에 친정 어머니에게 출산 선물로 받았다. 처네는 아이를 업었을 때 아이의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얇지만 곱게 재봉틀로 누벼진 것으로 꽤 비싼 것으로 기억하였다. 겨울에는 솜을 많이 넣고 크게 누빈 처네를 사용하였고, 안쪽에는 무명이나 광목으로 된 띠를 맸다. 여름에는 안쪽에 맸던 띠만 사용하였다. 돌산읍에 사는 황순배[74세,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는 사각형의 광목으로 되어 있고, 네 귀에 끈이 달린 띠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배냇저고리]
여수 지역에서에서는 목욕 후 처음 입히는 배냇저고리를 ‘이레안 옷’이나 ‘첫옷’ 등으로도 불렀다. 흰색의 고운 무명이나 융 등의 부드러운 감으로 깃과 섶을 달지 않는 한복의 저고리 형태로 재단하여 만들고, 고름 대신 길게 실끈을 만들어 달아 주며 수명장수를 기원하였다. 집안 어른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입던 옷을 뜯어서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부드러운 옷감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장점과 함께 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속신 때문이었다.
1963년에 큰아이를 낳은 김진희는 고운 무명을 이용하여 깃이 없는 한복 모양으로 본을 떠서 배내옷을 직접 만들었으며, 옷고름 대신 무명실을 꼬아 달아 긴 쪽으로 아이의 가슴을 한 번 돌려 맸다고 한다. 이것은 아기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였으며, 배냇저고리는 태어난 직후 목욕을 시키고 바로 입혔다.
황순배는 배냇저고리의 여밈을 실로 묶기만 하였고, 이영자[64세, 여수시 율촌면]는 매듭단추를 세 개 만들어 달았다고 한다. 또 두렁치마(앞치마라고도 불렀다)를 입히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아이를 키웠던 어머니들은 일반적으로 두렁치마를 사용하였으나 1950년대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모양은 비슷하나 길이가 길거나 짧기도 하며 실끈 대신 그냥 끈이 달린 기성의 배냇저고리를 사용한다.
[백일옷]
백일 동안 잘 자라 주었음을 축하하면서 입히는 백일옷은 아들·딸 구분하지 않고 주로 흰색의 풍차바지와 저고리를 입혔다. 저고리는 깃과 섶이 달린 원형의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명주나 비단, 고운 무명, 다듬은 모시 등을 사용하였으며, 계절에 따라 누비옷·솜옷·겹옷으로 지어 주었다. 특히 백 줄을 누빈 누비저고리나 백 조각을 이어서 만들어 수명장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태어난 지 백일 정도 되면 아기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므로, 옷을 만들 때는 저고리 겉깃 쪽 긴고름을 가슴을 돌려 맬 수 있도록 길게 달아 주었으며, 소매길이도 손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길게 만들어 입혔다. 여수 지역에서는 근대로 들어와 풍차바지(가랭이바지라고 불렀다) 위에 스웨터나 서양식 셔츠를 입히기도 하였다. 풍차바지는 주로 어른의 헌옷으로 만들었으며, 남아·여아 구분 없이 착용하였다.
[돌옷]
태어난 지 일 주년이 되는 첫 생일날 입는 돌옷은 남아와 여아를 구분하여 화려한 색깔의 옷으로 아름답게 꾸며 주었다. 출생 후 일 년이라는 시기는 성장의 초기 단계에서 한 고비를 넘겼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첫돌의 의례적 성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 이전의 옷과는 다른 차이를 보인다. 돌옷은 경제적 여건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색깔 있는 옷감을 사용하여 남아·여아를 구분하여 입히는 공통점을 보인다.
첫돌 옷의 기본구성을 보면 남아 옷은 포(袍)류로 일습을 갖추고 여아 옷은 치마저고리로 일습을 갖추는 등 어른 옷의 기본 구조와 같았다. 이와 같이 보편적인 돌 옷 차림새는 비교적 근간인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확립되거나 정착·일반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첫돌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색동옷은 어린아이의 상징적인 표상이 되었는데, 색동은 저고리와 마고자, 두루마기 등의 소매에 주로 이용되었다. 색동이란 소매(동)를 여러 가지 색의 옷감으로 아름답게 배열한 것을 말하며, 색동 소매가 달린 옷을 색동을 수식어로 사용하여 색동두루마기, 색동마고자, 색동저고리 등으로 분류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까치두루마기, 까치저고리 등으로 불렀다. 머리에 쓰는 굴레는 돌 이전에는 남아, 여아 모두에게 씌웠으나 돌 이후에는 여아에게 주로 씌웠다.
여수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경제적 여유에 따라 돌잔치를 하는 경우 일습을 갖추어 입히는 경우도 있었으나, 1950년대 이후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백일이나 돌을 챙기기가 어려워지자 사진관에서 빌려 준 저고리와 바지를 착용하고 사진만 찍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 이후의 돌 사진을 보면 재킷, 스웨터와 바지 등을 착용한 서양식 옷차림이 더 눈에 띈다. 오히려 최근의 돌 사진에서 포(袍)류나 까치저고리와 치마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