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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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安朱氏 |
영어의미역 | Sinan Ju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화치동 화치마을 |
집필자 | 김준옥 |
세거지 |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 화치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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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 화치마을 |
입향시기/연도 | 임진왜란 때 |
성씨시조 | 주희(朱熹) |
입향시조 | 주법명(朱法鳴) |
[정의]
주희를 시조로 하고 주법명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여수시 세거 성씨.
[연원]
중국 하남성 신안면(新安面)에서 태어난 주잠(朱潛)은 주희(朱熹)의 증손으로 몽고의 침입을 피해 아들 주여경(朱餘慶)과 문하생 섭공제(葉公濟) 등 7명의 학사(學士)를 데리고 고려로 망명하였다.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주인이 된 원이 고려에도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안 대신 능성(綾城)을 본관으로 사용했다. 이후 아들 주여경, 손자 주열(朱悅), 증손자 주인장(朱印長), 주인원(朱印遠), 주인환(朱印還) 등 후손들이 능성(綾城)·웅주(熊州)·전주(全州) 등지에서 각각 갈려 나갔다.
그 후손들은 다시 능주(綾州)·나주(羅州)·전주(全州)·함흥(咸興) 등 87개의 본관을 가졌으나 1902년(고종 39) 종중의 합의로 주석면(朱錫冕)이 상소하여 여러 파의 주씨는 신안주씨(新安朱氏)로 통일됐다. 여수의 신안주씨는 능주파들이 임진왜란 때 입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향경위]
입향조 주법명(朱法鳴)은 주희의 21세손이요, 주잠의 24세손이다. 문간공(文簡公) 주인원 중파조의 15세손으로 주몽룡(朱夢龍)의 손자이다. 할아버지 주몽룡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무열공(武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아버지 주인달(朱仁達)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입향조 주법명은 선조 때 진주에서 여수시 삼일동 화치마을에서 피신해서 살았다.
이후 이곳에다 세거 터를 마련하고 아들 주한동(朱漢東)과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던 남평문씨와 혼인을 하면서부터 여수에 눌러 살았다. 또, 주몽룡의 손자요 통덕랑에 음보된 아우 주무명(朱武鳴)도 여수시 율촌면 월산리 청대마을에 전입했으며, 입향조 주몽룡의 손자이며 주익달(朱益達)의 아들로서 역시 통덕랑을 지냈던 주사명(朱仕鳴)은 효종 때 진주에서 여수시 문수동으로 이거했다.
[현황]
입향조 주법명은 여수시 삼일동 화치마을에 세거 터를 잡았고, 입향 때 함께 왔던 동생 주무명은 여수시 율촌면 월산리 청대마을로 이주하여 그 후손이 현재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주무명의 후손은 청대마을을 비롯하여 신풍마을과 소라면 현천리 현천마을, 소라면 대포리 대포마을, 쌍봉동 봉계마을, 평려동 평려마을 등으로 분파되었다. 주사명의 후손은 미평동과 문수동 중심으로 살고 있다.
[관련유적]
신안주씨 제각으로 화산사(華山祠)와 세명당(世明堂)이 있다. 화산사는 주희의 제사를 위하여 주씨 문중과 관내 선비들의 부담으로 1918년에 화치마을에 건립했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화산사기(華山祠記)」(1923)가 전한다. 세명당은 1988년에 건립한 제각이나 1999년 마을 이주로 인하여 철거됨에 따라 여천동 내동마을에 화산사와 세명당을 옮겨 지었다. 또, 율촌면 월산리 외청마을에 1989년에 건립한 무현사(武賢祠)가 있다. 무현사는 인조 때 통덕랑을 지낸 주무명을 추모하고자 건립한 사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