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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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門傳喝-傳喝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 전승되는 소동패 놀이 중의 한 부분.
[개설]
두레는 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 노동을 하기 위한 조직으로, 소동패와 대동패로 나눈다. 소동패는 16세부터 19세까지의 소년을, 대동패는 20세 이상의 청년을 가리킨다. 소동패가 생긴 까닭은 농사를 짓는 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어린 소년들의 노동력까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연원]
소동패와 대동패는 조직의 규약대로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규칙을 지키며 노동 활동을 하였다. 소동패는 주로 풀베기와 김매기 등의 공동 노동을 담당하였는데, 그러한 농사일의 고달픔과 지루함을 잊고 작업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여수시 소라면 현천리에서 농악이나 춤, 노래 등을 생활화한 데서 유래하였다.
[놀이방법]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소동패가 다른 마을 대동패를 만나게 되면 그냥 도망쳐 버리지만, 자기 마을 대동패를 만나면 깍듯이 전갈을 아뢴다. 소동패가 대동패를 표시하는 영기(令旗)나 심지어 삽과 지게 같은 농기구만 보아도 이것이 대동패 경계를 드나드는 문으로 여기고 문전갈을 아뢴다. 또, 경계 지역 안으로 들어서서는 들전갈을 아뢴다.
소동패끼리 만났을 때는 전갈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 싸움으로 결정해 버린다. 소동패가 다른 소동패를 만나게 되면 지나갈 길목에 미리 영기를 꽂아 놓는다. 그러면 서로 지나가지 못하고 대치하는 상황이 된다. 상대가 약하다고 생각되면 막무가내로 밀쳐내고 통과를 시도하나 상대도 지지 않으려고 몸싸움을 벌인다. 이런 경우 상대의 영기문을 우리패의 영기가 통과하면 이기게 된다.
소호동 안산 소동패놀이의 문전갈과 들전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동패의 뒷영쪼시와 뒷소구잽이가 대동패의 영기 세워진 곳 앞에 무릎을 꿇고 전갈을 아뢴다. 주위에는 일꾼들이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군중에 문장군지용이요 불무천자지조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내상살문 열어주시오” 하면 대동패의 영쪼시들이 “듭소” 하고 한 쪽 영기를 빼어 문을 열어 준다. 그러면 소동패들은 들어와 다시 대동패의 좌상과 공원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들전갈은 소동패가 “천계지배 하운중에 만민이 나시도다. 신농씨 공경하사 가색한 농민님네. 풀뜯든 하운중에 들비를 감발하고, 불과 같이 더우신 날 내과 같이 지심제초허느라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하고 아뢰면 대동패 좌상이 “우리야 좋네만은 건네 소동중 공좌상은 어린 동기들 데리고 주먹은 잘고 메에 올라 신초 베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시는가?” 하고 말한다.
소동패의 영쪼시는 “천리가 천리가 아니라 지척이 천리오니 소인들은 돌아 갈랍니다” 라고 한다. 그러면 좌상이 묻는다. “우리가 그냥 갈 것이냐? 우리 어찌께 놀끄나? 중으로 놀끄나 상으로 놀끄나 하로 놀끄나” 한다. 이때 “중이나 하오 놉시다” 하면 노래하고 소구를 치며 좋게 헤어지지만 “상으로 놀자” 하면 싸움이 난다. 대개는 “하로 놉시다” 하면서 영쪼시와 소구잽이가 재빨리 일어나 「아리랑 타령」이나 「에야디야」 등의 노래 한 가락을 내놓는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어우러지는 즐거운 노래판이 되는 것이다.
[현황]
인사를 여쭙는 문전갈과 들전갈은 어른에 대한 예절을 중시한 농촌 사회의 전통이 담겨 있는 소중한 민속놀이의 일부이다. 여수시 소호동 안산마을은 현재 도시로 변모하여 이러한 놀이 형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여수시 소라면의 현천 소동패놀이는 문화재로 지정·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