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90
한자 金恩錫
영어공식명칭 Kim Eun-seok
이칭/별칭 김전은석(金田恩錫)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5년연표보기 - 김은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김은석 기독교도의 동방요배 및 신사참배 반대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김은석 검속
몰년 시기/일시 1988년연표보기 - 김은석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김은석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김은석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은석 이주지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니시구
활동지 김은석 활동지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니시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나고야북교회 목사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은석(金恩錫)[1905~1988]은 기독교 목사이다. 1940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포교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김은석은 1905년 6월 6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에서 출생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김전은석(金田恩錫)을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김은석은 1933년 7월 20일 경주 노동리야소교장로교회가 개최한 주일학교 하기아동강습회에서 성경·유희·창가 등을 교수하는 등 기독교 목사로서 활동하였다. 1938년 11월 29일에는 일제의 강요로 영주예배당에서 교도 300여 명과 함께 비상시 총후국민(銃後國民)으로써 종교보국(宗敎報國)에 철저히 하고자 기독교연합회[위원장 강석진(姜錫晉)]를 결성하였으며, 부위원장이 되어 영주신사를 참배하였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는 동아일보사 풍기지국의 고문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김은석은 1940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아이치현[愛知縣] 나고야시[名古屋市] 니시구[西區]에 정착하였다. 김은석은 나고야북교회[名古屋北敎會]의 목사로 시무하면서, 신자들에게 신궁과 신사 문제를 거론하며 참배를 부정하였다. 1941년 2월에는 경북 의성 출신의 목사 박상동(朴相東), 충남 부여 출신의 목사 추인봉(秋仁奉) 등 3명이 함께 기독교 포교를 통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일본화를 방지하고 일본의 국력이 피폐한 시기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 등을 협의하였다. 이에 박상동·추인봉 등의 목사와 함께 1941년부터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의식 고취,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신사참배 반대 등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예비 검속으로 1941년 12월부터 나고야동교회의 목사였던 박상동, 나고야남교회의 목사였던 추인봉을 비롯해 당시 지역 교회 지도자였던 경남 진주 출신의 장로 박상봉(朴尙奉), 경북 영일 출신의 신자 안승락(安承樂), 함남 원산 출신의 관창석(官昌錫), 경북 경주 출신의 장로 박영주(朴永周), 경북 영주 출신의 교회 집사 석사선(石泗璇), 경북 칠곡 출신의 장로 유야석(劉野錫) 등 1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 후 김은석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김은석은 2005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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