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191
한자 遠黃里
영어공식명칭 Wonhwang-ri
이칭/별칭 황죽,원황,원앙,황죽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선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 1일연표보기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동으로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 1일연표보기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동에서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로 개칭
성격 법정리
면적 2.51㎢
가구수 263가구
인구[남/여] 424명[남 191명|여 233명]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원황리(遠黃里)영덕군 병곡면 동남쪽에 있으며, 행정동은 원황1리·원황2리로 분동되어 있다. 자연 마을은 대포동[원황2리], 서실막, 운산, 아릿모치 등이 있다.

[명칭 유래]

원황리[원황1리]는 예전에 대나무숲이었다. 영해부(寧海府)에서 보면 이 지역이 누렇게 보여 황죽(黃竹)이라 하다가 원황(遠黃) 또는 원앙이라 하였다. 한편, 고려 말기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영해부 동헌(東軒)에서 바라볼 때 누렇게 보인다 하여 황죽리라 명명하였다는 설도 있다. 원황2리한개 혹은 대포(大浦)라 불리는데, 이곳에 큰 개[浦]가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석범(李錫範)이 입주하여 마을 이름을 대포라 하였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원황리[원황1리]는 고려 말 14세기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명인(朴命仁)과 김치우(金致禹)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원황1리의 북쪽 이천 제방 아래에 있는 서실막(書室幕)은 영조(英祖)때 정언(正言)을 지낸 묵산(默山) 남기만(南基萬)[1730~1796]이 벼슬에 오르기 전 여기서 막(幕)을 짓고 공부하였는데, 후생들이 남기만를 따라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원황2리는 18세기 초 이석범이 입주하여 '대포'라 명명하였고, 그 후 장씨(張氏), 임씨(林氏) 등이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하였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영해군 북이면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 당시 거무역동과 북초면의 송하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원황동이라 하였으며,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부터 동을 리(里)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자연환경]

원황1리칠보산의 한 맥이 동남쪽으로 뻗은 등운산(騰雲山)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원황2리는 바다와 접해 있는데, 옛날에는 일대가 바다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해안가에는 백모래와 백합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천천(伊川川)과 아곡천(牙谷川)이 합류하여 원황2리 마을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갈대밭이 생긴 것은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웅덩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현재는 하천을 곧게 내어 직강천(直江川)이라고 부른다. 원황2리는 들 가운데 있어 동쪽에는 소나무숲과 고래불이 해풍(海風)을 막아주고 있고, 남쪽에는 덕천(德川)의 넓은 들과 연결된 평야를 이루고 있다.

[현황]

원황리의 2020년 말 면적은 2.51㎢이며, 2021년 5월 기준 총 263가구에 424명[남 191명, 여 233명][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거주하는데, 병곡면에서 가장 인구가 많다. 원황리 동쪽은 동해와 연접하며, 서쪽은 각리리, 남쪽은 덕천리·신평리·송천리, 북쪽은 거무역리가 있다. 특산물로는 배·부추·양파가 있으며, 부업으로 양봉과 소를 사육한다. 주민 8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대부분 임차(賃借) 농업이다. 주부들은 후포나 강구 등으로 수산물[홍게] 가공 공장으로 출퇴근하기도 한다. 원황리에는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영덕출장소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