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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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朝陽閣 |
이칭/별칭 | 명원루,서세루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문화원길 6[창구동 1-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태훈 |
건립 시기/일시 | 1368년 - 명원루[조양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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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592년 - 명원루[조양각] 소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638년 - 한덕급이 명원루를 조양각이라 개명하여 중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02년 - 영천조양각 중건[1702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42년 - 영천조양각 중건[1742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1년 4월 25일 - 영천조양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영천조양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06년 - 영천조양각 중수 |
현 소재지 | 조양각 - 경상북도 영천시 문화원길 6[창구동 1-1] |
성격 | 누정 |
양식 | 이익공|겹처마|팔작지붕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3칸 |
소유자 | 영천시 |
관리자 | 영천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문물|보호단위 등급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에 있는 고려 말 부사 이용(李容)이 건립한 관속 누각.
[개설]
조양각(朝陽閣)은 서세루(瑞世樓)라고도 하며, 고려 말에 명원루(明遠樓)로 창건되어 여러 차례 시대의 변란에도 지금까지 우뚝 서있는 영천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조양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누각으로 손꼽히는 경상남도 밀양의 영남루·진주의 촉석루 등과 함께 영남 3루라고도 전하며, 안동의 영호루·울산의 태화루·양산의 쌍벽루·김천의 연자루와 합쳐 영남 7루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영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해 수많은 명현들이 조양각을 거쳐 갔으며 현재까지 그들의 시가 편액되어 남아있다.
영천은 조선 시대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의 중간 지점으로 금호강변의 조양각에서 왜의 조선통신사가 기착점으로 이용하고 마상연(馬上宴) 등 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창건 당시와 조선 시대의 규모와 모습은 잃었으나 여전히 금호강 청석벽 위에 늠늠하게 서 있다.
현재 영천 문화원이 그 옆에 위치해 영천 문화의 초석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대구·경산·의성·군위·청송·경주·포항 등지에서 영천을 거쳐 타 도시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조양각을 거쳐야 했다. 당시에는 영천 읍성이 있어 읍성내의 동서남북 대로의 교착지점에 조양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치]
조양각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문화원길 6[창구동 1-1]에 있다. 대구·경산 등지에서 영천 시내를 들어오면 서문통[영천시 성내동과 화룡동의 교차로]을 거쳐 포항 방면의 동문통[영천시 문외동], 청송 방면의 북문통[영천시 문내동, 교촌동]으로 이어진다. 조양각은 이 두 통로의 중간에 놓인 교차점[남문통]에 놓여 있다. 현재 영천 문화원과 조양 공원을 찾으면 그 옆에 조양각이 보인다.
[변천]
명원루[조양각]는 1934년에 작성된 『영양지(永陽誌)』에 따르면 고려 말 부사 이용이 1368년(공민왕 17)에 창건했다고 한다. 명원루의 당호는 당나라 문장가인 한퇴지(韓退之)의 시 중에 ‘원목증쌍명(遠目增雙明)’[훤희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 오는 듯하다]이란 시구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1482년 군수 신윤종(申允宗)이 동서별실을 고쳐 동실을 청량당(淸凉堂), 서실을 쌍청당(雙淸堂)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1485년에도 명원루를 중수하고 포주(苞廚)·구영(九楹)을 별도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592년 7월 27일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38년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명원루 터에 누각 15칸[현재의 규모]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 했다.
1676년 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중수했고 1702년 군수 권영경(權寧經)이 중창했다. 1742년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중창하고 누를 서세루(瑞世樓), 내문을 남덕문(覽德門), 외문을 곤구문(昆邱門)이라 했다. 1762년 군수 조재득(趙載得)이 중수했고 1804년 군수 이의교(李義敎) 때 외문인 곤구문이 5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에 중건하고 내의루(來儀樓)라 했다. 중건된 외문 내의루는 고루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70년과 1886년에 각각 중수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1년 가을에 군수 장윤규(張潤圭)가 수선했고, 그 후 일본인들이 조양심상소학교를 건립하면서 누각의 내외문을 비롯한 부속건물을 모두 철거했다. 해방후인 1947년과 1956년, 1983년에도 군수 최효경, 군수 박돈양, 시장 마용수가 중수했다.
가장 최근인 손이목 시장 때인 2006년에는 초석 일부 교체, 방[실]의 창호와 벽을 복원, 서까래 교체, 번와, 단청 등의 전면 해체를 통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조양각은 건립된지 640여 년이 지나도록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창·중건·중수·수선 등이 이루어졌다. 이는 조양각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 때문으로 여겨진다.
[형태]
조양각은 보현산에서 발원한 두 강[자호천·고현천]이 양쪽으로 흘러 조양각 일대에서 다시 하나로 합해지는 지점인 현 위치에 세워진 영천의 상징적 고적이다. 금호강[남강]변 북쪽 벼랑[청석바위] 위에 남동향으로 앉아 있는 조양각은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현재의 모습은 1638년에 이루어 진 것이다. 하지만 조양각 주변으로 협각·내문·외문 등은 1921년에 소실되어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했다.
평면은 오른쪽 협칸의 뒷열과 중간열 칸에 방을 두고 나머지는 마루로 구성한 단순한 평면이다. 하지만 건물 가장자리 전체에 계자각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었고 그 하부를 누하공간으로 처리했다. 진입은 일반적으로 강에 면한 누각의 특성상 배면진입으로 처리했다. 구조는 암반 위를 정지하고 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 건물전체를 원형기둥을 세워 오량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기둥 상부는 창방과 장혀 사이를 화반 2구씩 놓고 이익공을 처리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처리해 위용있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현황]
강 절벽에 우뚝 서 있는 조양각은 시원한 바람이 늘 불고 확 트인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주변은 최근 조양 공원이 조성되어 한층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다가서 있다. 바로 옆 동쪽에는 영천 문화원이 있고 그 주변에 산남의진비와 영천지구 전승비가 서 있다. 또 조양각 북서편 약간 높은 곳에는 사현대라는 비림이 조성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와계정이 있다.
건물 정면인 강변 쪽에는 ‘서세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진입부쪽인 배면에는 ‘조양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또 내부에는 정몽주를 비롯한 수많은 명현들의 시가 편액되어 걸려 있고, 상량문·중건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한다.
사방이 개방된 만큼 주위를 철제 울타리를 쳐 보호하고 있고, 건물 처마와 천정부에 부시[새가 날아들지 말라고 쳐 놓은 그물 망]가 있어 약간 시야를 가리고 있다.
1981년 4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양각은 영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다. 십 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이루어진 만큼 영천에서는 아끼고 길이 보존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주변의 부속건물들이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한 점은 아쉽고 하루 빨리 고증을 통해 복원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