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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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演先生-影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4년 - 「바위 속에서 찾은 하연 선생의 영정」 『시흥 소래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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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3년 - 「바위 속에서 찾은 하연 선생의 영정」『시흥 문화유산』에 수록 |
관련 지명 | 하연 선생 묘 - 경기 시흥시 신천동 소산서원길 20 |
성격 | 영험담 |
주요 등장 인물 | 하연|하연의 자손|왜구 |
모티프 유형 | 하연의 꿈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아래에 묘가 있는 하연 선생의 영정에 대한 이야기.
[개설]
임진왜란 때 하연(河演)[1376~1453]의 영정(影幀)을 왜군이 가져가려고 했으나 하연이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고, 훗날 하연이 꿈에 나타나서 영정이 바위틈에 있다고 일러 주어 다시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바위 속에서 찾은 하연 선생의 영정」 이야기는 2004년 시흥시와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가 편찬한 『시흥 소래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2013년 시흥시에서 편찬한 『시흥 문화유산』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하연은 성리학 전파에 앞장선 조선 전기 유학자로 제5대 왕 문종 재위 기간에 이르러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하연의 묘를 쓰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하다는 수십 명의 지관을 불러 명당을 찾게 했으나 수개월이 지나도록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명의 지관이 소래산 부근에 명당 자리가 있다고 하여 그 자리에 계란을 놓았다. 그리고 이튿날 이른 새벽에 병아리 울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전날 계란을 놓았던 곳에서 병아리가 깨어나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이 명당임을 알고 그 자리에 하연 묘를 썼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묘소 아래에 살면서 마을 이름을 계란마을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연에게는 생전에 아들 셋이 있었는데 가운데 아들의 그림 솜씨가 좋아 아버지의 영정을 석 장 그려서 한 사람씩 나누어 가졌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였다. 막내아들의 후손이 영정을 산소 앞에 있는 사당에 놓고 피난을 갔다. 얼마 후 왜군이 와서 사당에 모셔져 있는 하연의 영정을 보고는 탐이 나서 가지고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족자가 너무 무거워서 가져갈 수 없어 바위틈에 버리고 갔다. 난리가 끝난 후 자손들이 돌아와서 영정이 없어진 것을 보고 걱정하였는데 꿈에 하연이 나타나서 말하길, “왜놈들이 내 영정을 가지고 가려고 해서 못 가져가게 하려고 무겁게 했더니 바위틈에 쑤셔 넣고 갔다.”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자손들은 바위틈에서 영정을 찾아 다시 모셨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하연의 영정, 왜군의 침략, 바위틈, 하연의 꿈을 모티프로 하여 임진왜란 때 영정을 보존하고 되찾을 수 있었던 사연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하연 선생이 죽어서도 영험한 분임을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