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0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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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Well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목진호 |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서 식수나 용수를 얻기 위해 지하를 파서 만든 설비.
[개설]
2007년에 발간된 『시흥시사』에 의하면, 우물과 관련된 마을 이름이나 우물 터 명칭이 여럿 등장한다. 배우물, 생금우물 약수터, 찬우물, 산우물, 높은우물, 고주물, 오자산사지(五子山寺址)의 우물터, 운흥산사지(雲興山寺址)의 우물터, 새우개 당제 우물터 등이 그것이다. 2018년 현재 시흥시에는 황고개 약수터, 목감 약수터, 비둘기공원 약수터, 능곡 약수터, 생금우물 약수터 등 여러 곳의 우물 대용 약수터가 있다.
[시흥의 우물]
2006년에 발간된 『시흥시 지명 유래』에는 구래우물, 농박골우물, 소래산 약수, 우물고개, 원수골우물, 절터우물, 재턱골우물, 삼신우물[三神井], 새말우물 등의 이름이 나온다.
먼저 구래우물, 농박골우물, 소래산 약수, 우물고개, 원수골우물, 절터우물, 재턱골우물은 시흥시 대야동에 있다. 구래우물은 아랫대야리[下大也里]에 있던 우물이었으나, 1980년대 초 소래읍 구획 정리 때 없어졌다. 농박골우물은 조선 후기 대야동 주민들이 물당을 짓고 물장사를 했다고 하는 우물이다. 소래산 약수는 소래산 중턱에 있던 약수인데, 이곳에 우물 세 개가 있었다고 한다. 우물고개는 동이점골과 동방교 사이 고개 중턱에 있는 우물이다. 원수골우물은 병풍바위[장군바위] 밑에 있는 우물로 앉은뱅이가 물을 마시다 떨어져 죽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절터우물과 재턱골우물은 웃대야리[上大也里]와 절터 사이에 있는 우물로 대야동 주민들이 제사에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삼신우물은 시흥시 계수동에 있다. 안골마을 뒤 능밑 북쪽에 있던 우물로 예전에는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가재가 나왔을 정도로 물이 맑아서 주민들이 애용했으나 수도가 들어온 후로는 찾는 사람이 없다. 주민 중 할머니 한 분이 우물을 청소하고 기도를 하곤 했으나 그 할머니가 사망한 후로는 찾는 사람이 없다. 삼신은 태를 보호하는 신의 개념을 넘어 아이를 점지해 주는 신에서부터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건강을 돌보아 주는 신이다.
새말우물은 시흥시 신천동에 있다. 새말우물은 새말 노인정에 있던 ‘할아버지우물’과 공장 안에 있는 ‘할머니우물’을 함께 일컫는데, 해마다 음력 7월 1일 여기서 우물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할머니우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과림동, 거모동, 은행동, 방산동, 화정동, 포동 등에도 우물과 약수터가 있다. 과림동 부라위마을에는 옻이 올랐을 때 씻으면 효험이 있다는 우물이 있었다. 몸에 옻이 오른 사람들이 이 우물에 와서 목욕을 하였는데, 1990년대 말 마을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우물을 매몰하여 사라졌다. 의료 시설이 미약했던 과거에는 이러한 약수에 의존하는 경향이 오늘날에 비하여 강하였다. 거모동 배우물마을에는 뱃사람들이 물을 길어 먹기 위해 만든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죽율동 생금집 근처에는 지금도 생금우물 약수터가 있다. 파평 윤씨(坡平尹氏) 집성촌인 은행동에는 찬우물, 방산동에는 산우물, 정왕동에는 높은우물이 있다. 화정동의 고주물[꽃우물]은 지금은 안산시 단원구에 속한다. 포동 새우개 당제의 우물터는 당제 전에 미리 청소를 하고, 당제일에는 우물 앞에서 맑은 물 얻기를 염원하는 뜻으로 술을 따르고 축원을 드리는 우물 고사를 지냈다.
[우물 고사]
죽율동 정촌(正村)에서는 추석 전날 우물을 청소하고 추석에 우물 고사를 지냈다. 오전 10시나 11시경에 모여서 고사를 올리고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마을의 공동 우물은 세 곳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판 것을 ‘영좌우물’이라고 불렀다. 고사 당일에는 각자 사용하는 우물에 가서 같은 시간에 각 우물에 따로 고사를 올렸다. 제물은 소머리와 막걸리를 올렸다. 영좌우물은 소머리 중 위쪽 부분을 놓고 나머지 두 우물에는 아래쪽을 반으로 갈라 하나씩을 놓았다. 소머리는 가가호호 갹출하여 장만하였다. 당시에는 돈이 귀하고 추석 전날은 아직 마을에 돈이 돌기 전이었으므로 누군가의 돈을 우선 빌려서 사용하고, 고깃값은 나중에 추수 후 돈이 모이는 대로 상환하였다. 이 고사가 언제부터 행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연원이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1970년대 무렵에 단절되어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신천동 용해부리(龍;每-)에서는 마을의 공동 우물에 매년 음력 7월 1일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현동의 은실마을에서 만신(萬神)을 불러 용왕님께 도당굿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도 부녀자들이 조밥을 지어 깨끗한 종이에 싸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에 우물에 넣으며 가정의 안정과 평안을 빌었다. 현재는 우물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우물 고사도 지내지 않고 있다.
조남동 을미[隱美]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7월 우물에 떡, 돼지머리, 삼색 과일[대추·밤·감], 조라[막걸리]를 차려 놓고 대동 고사를 지냈다. 그러나 근래에는 우물을 사용하지 않아 자연히 우물 고사도 지내지 않게 되었다.
[우물 관련 지명]
시흥의 우물에 관한 전설로는 홈뿌리우물, 해방꽃우물, 은우물, 노루우물, 관우물, 찬우물 등이 전해 내려온다. ‘홈뿌리우물’은 장곡동의 옛 이름 장종리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이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마을 내에 우물을 파지 않고, 마을 외곽에 우물을 파고 ‘홈뿌리’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 '해방꽃우물'은 해방초우물, 큰우물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장상동[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노리울[장곡(獐谷)]마을에 있었는데, 1994년 메워졌다고 한다. '은우물'은 장상동 동막골마을과 개멸[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사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어떤 부자가 은비녀를 빠뜨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노루우물'은 일명 큰우물이라고 하는데, 장곡동에 이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관우물'은 시흥군 군자면 목내리 산47번지[지금의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에 있는데, 조선조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묘와 관련되었다고 한다. '찬우물'은 시흥군 과천면 갈현리[지금의 과천시 갈현동] 우물로 정조대왕이 수원을 지나다 마신 후, 물맛이 좋고 차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시흥시민과 우물]
우물과 관련한 시흥의 문화 행사로는 1984년 제2복음자리[한독마을]에서 열린 '복음자리 7주년 기념 단오 잔치' 때 풍물패가 공동 우물 앞에서 샘굿을 치며 우물제를 올린 것이 있다. 이날 행해진 탈놀이에서는 공동 우물 대신 개인 우물을 파고 담장을 만들게 된 현실을 풍자와 비판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는데, 실제로 1980년대 중반 가뭄으로 공동 우물 대신 개인 우물을 파면서 사회적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시민들의 힘으로 우물을 지킨 사례도 있다. 장현지구 보금자리 사업과 관련하여 장곡동 노루우물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2014년 7월부터 주민들은 노루우물 보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장곡동 노루우물 보존 운동을 다양하게 벌였다. 노루우물은 500년간 이어 온 장곡동의 젖줄이다. 욕심쟁이 부자가 노루바위의 목을 깨뜨려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 우물은 전통 시대에는 식수원이자 농업용수였고, 1990년대 후반까지 마을의 대소사가 이루어지던 소통의 장소였다. 노루우물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는 2015년 11월 18일 노루우물을 보전하기로 장현지구 사업 계획을 수정하였고, 노루우물 보존 운동의 성공을 계기로 2015년 장곡동의 마을 축제인 '장곡 노루마루 축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