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217 |
---|---|
영어공식명칭 | Baenaru-maeul |
이칭/별칭 | 이진(梨津)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남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정왕본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개설]
배나루마을은 병자호란 때 의병장 원성모(元成模)[1569~1636]가 두 아들과 함께 덕물도에서 순국하자 그 후손들인 원주 원씨(原州元氏)들이 배나루의 동산에 묘를 쓰면서 뿌리를 내린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군자염전이 조성되고 수인선 협궤철도 군자역도 생겨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으나, 1990년대 시화지구 개발로 쇠퇴하여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명칭 유래]
배나루마을은 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어 배나루라는 순우리말로 불렸다. ‘이진(梨津)’이라 칭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표기된 한자 이름으로, 배나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배 ‘주(舟)’ 자를 배나무 ‘이(梨)’ 자로 표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형성 및 변천]
배나루마을은 바닷가 마을이면서 농촌 지역으로 원주 원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배나루마을에 원주 원씨 시중공계(侍中公系) 음성공파(陰城公派)가 들어온 시기는 조선 중기이다. 의병장 원성모가 병자호란 때 배나루 일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순절하자, 후손들이 원성모의 묘를 배나루의 동산에 쓰면서 뿌리를 내렸고 이후 자손들이 번성하였다.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나루터가 있던 마을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 군자염전 제방을 축조하면서 배가 더 이상 드나들지 못하게 됐다.
군자염전이 건설되면서 염전의 인부들이 모여들고 수인선 협궤철도 군자역도 생겨 마을 규모가 커지자, 배나루마을도 마을 서남쪽 지역을 ‘작은 배나루’라 부르고, 북쪽 지역을 ‘큰 배나루’라 불렀다. 군서국민학교의 개교와 군자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던 배나루마을은 시화지구 개발로 일대 변화를 맞이하였다. 아파트와 주택들이 건설되면서 이전의 마을 모습을 잃었고, 협궤열차가 달리던 수인선도 1994년 한대 앞에서 소래포구까지 가던 구간마저 폐선되면서 배나루마을의 번성을 가져왔던 군자역은 문을 닫았다.
배나루마을에서는 1988년경 원성모 묘가 본래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장이 이루어졌고 이후 가구들이 마을을 떠났다. 현재 배나루마을에는 마유로가 지나가고 마을의 경계석처럼 원성모 장군 순국비가 마을 입구 도로에 서 있다. 하지만 배나루를 지키는 주민들은 많지 않다. 현재 거주 가구 수는 임대형 공장을 포함하여 10가구가 채 되지 않는다.
[자연환경]
안산선을 기준으로 남측의 도심과 달리 북측인 배나루마을에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낮은 야산이 마을을 안고 있다.
[현황]
2018년 현재 자연 마을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몇 안 되는 가구 앞으로 안산선이 지나는 한적하고 외진 곳이 되어 마을이라고 이름하기도 애매할 정도이다. 원성모 묘가 있는 원주 원씨 선산 아래로 재실(齋室)과 함께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이 모여 있고, 비닐하우스들이 마을 입구부터 넓게 펼쳐져 있다. 마유로가 신설되면서 마을 진입로 확보가 어려워 마유로 도로 아래 통로를 이용하는 불편함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