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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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制憲議員選擧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지수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8년 5월 10일 - 제헌 의원 선거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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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시기/일시 | 1948년 2월 26일 - 유엔 소총회에서 선거 가능 지역[남한]에서의 총선안 가결 |
성격 | 선거 |
관련 인물/단체 | 이종린|김동준 |
[정의]
1948년 5월 10일 충청남도 서산군에서 실시된 선거.
[역사적 배경]
1945년 12월 공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신탁 통치 반대 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무산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UN총회로 넘겨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안’을 가결시켰으나, 소련의 반대로 이 또한 무산되었다. 그러자 미국은 UN 소총회를 통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안[단독 정부 수립안]’을 가결시킨 뒤, 이에 근거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만 이른바 제헌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서산 지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출마하여 경합하였으며, 당시 갑구와 을구로 나뉘어 선거가 진행되었다.
[경과]
제헌 의원 선거 당시 서산 지역에서는 후보자 난립 현상이 심각하였다. 서산읍과 인지면, 부석면, 팔봉면 등 현재 서산시 소속의 10개 면으로 구성된 서산 갑구에는 8명[남정, 이종린, 백낙선, 신항균, 채택용, 안만복, 박완석, 김남윤]이 출마하였고, 현재 태안군 소속 면과 해미면, 고북면으로 구성된 서산 을구에는 6명[이종철, 김기인, 박동래, 김동준, 이상기, 김제능]의 후보자가 출마하였다. 출마자들의 신상 중 직업이 농업이라 표기된 사람들은 대부분 지주들이었다.
[결과]
1948년 5월 10일 제헌 의원 선거의 결과 갑구에서는 무소속의 이종린[천도교인], 을구에서는 김동준[대지주]이 당선되었다. 갑구의 당선자인 이종린은 1883년 서산에서 출생하였다. 구한말 성균관 박사 출신으로 오랫동안 언론계에 종사하며 『대한민보(大韓民報)』 주필, 『독립신문』 발행 등으로 3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천도교 구파 소속 종교인으로 개벽사의 사장을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물산 장려 운동, 신간회 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 천도교 대종 사장, 교령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벌였다.
해방 후 이종린은 중앙에서 각종 정치 사회 단체에 관여하다가 제헌 의원 선거[지역구 충청남도 서산 갑, 소속 정당 무소속]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헌법 기초 위원, 교통 체신 위원장, 외무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제헌 의원에 당선된 것은 무엇보다 서산 지역에 천도교 교세가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이종린은 1949년 이른바 ‘반민 특위’에 소환되어 친일 행적을 조사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종린은 1950년 5월에 실시된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일민구락부(一民俱樂部) 소속으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을구의 당선자인 김동준은 1905년 서산[태안군 태안읍 어은리]에서 출생하였다. 1934년 동경법정대학을 졸업한 인물로 대학 졸업 후 만주 등지에서 관리 생활을 하다가 만주국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 사장을 역임하다가 제헌 의원 선거 때 서산 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한편 단독 정부 수립안이 결정되자 김구(金九) 등 남북 협상 주도 세력은 선거를 거부하였으며, 좌익들은 남북한 지역의 인민 대표자 회의 소집을 위한 지하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서산 지역에서도 남조선노동당의 주도로 지하 선거[이른바 연판장 선거]가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