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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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偉材 |
영어음역 | Gim Wijae |
이칭/별칭 | 사홍(士弘),미암(迷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칠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춘진 |
출생 시기/일시 | 1701년 - 김위재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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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21년 - 완도군 신지도로 귀양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낙향 |
거주|이주지 | 서산군 화변면 창촌리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칠전리 |
사당|배향지 | 송곡서원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무학로 1419[애정리 495] |
성격 | 유생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정의]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홍(士弘), 호는 미암(迷菴). 김장생(金長生)의 6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1633~1687]이고 할아버지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김진구(金鎭龜)[1651~1704], 아버지는 형조참판을 지낸 김운택(金雲澤)[1673~1722]이다. 아들은 김정묵이다. 광산 김씨의 서산 입향조이다.
[활동 사항]
김위재(金偉材)는 정호(鄭澔)[1648~173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완도군 신지도(薪智島)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1724년 영조 즉위 후 사면되어 서산군 화변면 창촌리[현 서산시 부석면 창리]로 낙향하였다. 신임사화 때 화를 당한 피해자의 자손들이 대부분 음사(蔭仕)를 받아 한양으로 갔으나 김위재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평생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후에도 학행(學行)으로 사산감역(四山監役), 부솔(副率)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후에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나 이 역시 거절하였다. 서산 출신으로 영조 때 대사헌을 지낸 김유경(金有慶)은 그의 학식과 덕을 칭송하였고, 서산의 사림과 아이들까지 김위재를 존경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학식이 공자 못지않다고 하여 ‘호서 부자(夫子)’[공자를 높여 부르는 말]라고 불렀다.
[학문과 저술]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정리한 글씨첩인 『근묵(槿墨)』에 「김위재 간찰(金偉材簡札)」이 들어 있다.
[상훈과 추모]
1813년(순조 13)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495번지에 있는 송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송곡서원에서 펴낸 『행장록(行狀錄)』에는 김위재와 관련하여 ‘미암김선생행장 방재원지 미급추래(迷菴金先生行狀方在遠地未及推來)’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1753년(영조 29) 11월 임영(林煐) 등 서산의 유생들이 김위재를 성암서원에 추배하기 위해 연대 서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