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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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夢亮-崔鎬周-羅州丁氏三綱旌閭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
집필자 | 고수연 |
건립 시기/일시 | 1757년 - 최몽량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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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920년 - 나주 정씨 정려 건립 |
현 소재지 | 최몽량·최호주·나주 정씨 삼강정려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 |
원소재지 | 최몽량·최호주·나주 정씨 삼강정려 - 경기도 양주 |
성격 | 삼강 정려 |
양식 | 홑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일제 강점기 충신 최몽량(崔夢亮)과 효자 최호주(崔鎬周), 열녀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삼강 정려.
[개설]
최몽량·최호주·나주 정씨 삼강정려(崔夢亮·崔鎬周·羅州丁氏三綱旌閭)는 충신 최몽량[1579~1627]과 효자 최호주, 그리고 최호문(崔鎬文)의 처 열녀 나주 정씨의 명정 현판을 한데 모은 정려각이다. 서산 지역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입향조는 최사(崔泗)로 최몽량의 아들이다. 최사는 원래 경기도 양주에서 살다가 서산시 지곡으로 입향하였다.
최몽량의 자는 계명(啓明), 호는 율암(栗庵)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좌랑에 올랐다. 1624년(이조 2)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 의주판관으로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아우와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포로가 되었을 당시 청나라 장수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최몽량은 1748년(영조 24) 10월 3일에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명정문(命旌文)에 의하면 1757년(영조 33) 당시 최몽량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판서 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을 증직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순조 때에는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909년(순종 3)에는 지방관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여 최몽량의 공을 다시 평가하였다.
효자 최호주는 호가 옥천(玉泉)이며, 충신 최몽량의 10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자로 알려졌는데,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지성으로 간병하고 투약하였으나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호주가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여 영지를 구해다 주니 부친이 회생하였다고 전한다.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증직되었다.
열녀 나주 정씨는 효자 최호주의 형인 최호문의 처이다. 나주 정씨는 본래 천성이 단아하고 부덕을 겸비하여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남편 최호문이 병을 앓게 되자 매일 산천에 기도하고 지성으로 간병하여 병이 완쾌되었다. 그러나 3년 뒤에 남편이 다시 병이 나서 위독해지자 나주 정씨는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를 먹여 생명을 3일간 연장시켰다고 한다.
[위치]
서산시 지곡면 소재지인 화천리 사거리에서 동쪽 도로를 따라 800m 정도 가면 ‘솔대배기’라고 부르는 곳이 나오는데, 최몽량·최호주·나주 정씨 삼강정려는 구 마을 회관 뒤편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변천]
최몽량·최호주·나주 정씨 삼강정려는 경주 최씨가 배출한 충효열의 삼강 정려이다. 최몽량에게 정려를 내리자는 논의는 숙종 대부터 있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하면 1690년(숙종 16) 9월 3일 이조참판 이현일(李玄逸)이 임금에게 최몽량의 행적을 칭송하며 정려를 내릴 것을 청하였고, 곧바로 비답(批答)이 있었다. 그러나 정려는 당시에 건립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명정문에 의하면 정려는 1757년에서야 비로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효자 최호주는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나주 정씨는 열행이 널리 알려져 1920년에 정려를 세우게 되었다.
[형태]
충신 최몽량과 효자 최호주, 최호문 처 열녀 나주 정씨의 명정 현판이 하나의 정려각 안에 있다.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정면만을 개방하고 3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구조는 낮은 주형 장초석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현황]
2011년 현재 최몽량·최호주·나주 정씨 삼강정려 내부에는 우측에 ‘증자헌대부이조판서양관대제학통훈대부행의주판관증시충의공최몽량지문(贈資憲大夫吏曹判書兩館大提學通訓大夫行義州判官贈諡忠毅公崔夢亮之門)’, 중앙에 ‘효자정삼품통정대부비서원승경주최호주지문(孝子正三品通政大夫秘書院丞慶州崔鎬周之門)’, 좌측에 ‘열녀학생최호문처유인나주정씨지문(烈女學生崔鎬文妻孺人羅州丁氏之門)’이라 쓰인 명정문이 걸려 있다. 중앙에는 최호주의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충효열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였던 조선 시대에 매우 강조되었던 덕목이었다. 최몽량·최호주·나주 정씨 삼강정려는 서산 일대에 정착한 경주 최씨 가문의 역사와 사회적 위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