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627 |
---|---|
한자 | 瑞山明宗大王胎室-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문수골길 94-8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8년 3월 26일 -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 보물 제1976호로 지정 |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 보물 재지정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538년 - 태실 건립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538년 -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瑃齡阿只氏胎室)’ 비 건립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546년 -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 비 건립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711년 - ‘왕자전하태실비(王子殿下胎室碑)’ 비 건립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5년 - 일제 강점기 이후 돌보지 않아 석조물이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11월 19일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
현 소재지 | 명종대왕 태실 및 비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문수골길 94-8[태봉리 산6-2] |
원소재지 | 명종대왕 태실 및 비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문수골길 94-8[태봉리 산6-2] |
성격 | 태실|비 |
양식 | 석종형 |
관련 인물 | 명종(明宗) |
크기(높이,길이,둘레) | 273㎝[전체 높이]|90㎝[태실 높이] |
면적 | 132.23㎡[40여 평] |
소유자 | 농림수산식품부 |
관리자 | 농림수산식품부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 있는 조선 시대 명종(明宗)의 태실과 비.
[건립 경위]
명종대왕 태실(明宗大王胎室)은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1534~1567]의 태를 모셨던 곳으로, 1538년(중종 33)에 건립되었다. 태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 두는 작은 돌방을 말한다.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 3기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瑃齡阿只氏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 비는 1538년 태실을 만들면서 건립되었다.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각석되어 있는 비는 1546년(명종 1) 명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태실을 봉심해야 하기 때문에 건립되었다. 이후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1711년(숙종 37) ‘왕자전하태실비(王子殿下胎室碑)’를 개각하여 세웠다.
[위치]
서산시 운산면 소재지에서 국도 32호선을 따라 해미 방향으로 약 5㎞ 정도 가면, 도로 좌측으로 문수사(文殊寺)로 들어가는 태봉리 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명조대왕 태실은 도로에서 약 1㎞ 정도 들어간 해발 약 130m의 태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총면적은 132.23㎡[약 40여 평]이다. 방형의 대좌 위에 태함을 넣은 석종형 부도의 태실이 있으며, 그 위에 8각 옥개석을 놓고 보주형의 석재로 마무리하였다. 전체 높이는 273㎝, 태실의 높이는 90㎝이며, 각 변이 약 2m인 8각 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태실 앞에는 3기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대군춘령아지씨태실’이라 음각되어 있는 비의 전체 높이는 196㎝, 비신의 크기는 너비 64㎝, 두께 14㎝, 높이 86㎝이다. ‘주상전하태실’이라 각석되어 있는 비의 전체 높이는 195㎝이며, 비신의 크기는 너비 60㎝, 두께 20㎝, 높이 123㎝이다.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고 지대석과 귀부는 일석이다. ‘왕자전하태실비(王子殿下胎室碑)’라고 개각한 비는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 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螭首)로 조성되었다.
[현황]
2019년 현재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서산시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돌보지 않아 석조물이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1975년에 복원하였으며, 1986년 11월 19일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2018년 3월 26일 보물 제197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일대는 명종의 태실로 선택될 정도로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 ‘태봉리(胎封里)’라는 지명도 명종의 태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