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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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德文 |
영어공식명칭 | Bae Deokmun |
이칭/별칭 | 숙회(叔晦),서암(書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우인수 |
출생 시기/일시 | 1525년 - 배덕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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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배덕문 별시 문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배덕문 성주성 수복 |
몰년 시기/일시 | 1602년 - 배덕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20년 - 배덕문 신도비 건립 |
출생지 | 배덕문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
활동지 | 성주성 - 경상북도 성주군 |
묘소 | 배덕문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한성부서윤|고부 군수 |
[정의]
조선 시대 성주 출신의 의병장.
[개설]
임진왜란 때 늦은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성주성을 구하고 백성의 희생을 막은 의병장이다.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岩). 배현(裵俔)의 후손이며. 배치(裵絺)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배주(裵綢), 아들은 배설(裵楔), 배건(裵健), 배즙이다.
[활동 사항]
배덕문(裵德文)[1525~1603]은 1525년(중종 20)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에서 태어났다. 6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천성이 착해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행실이 단정하였다. 하루는 노루가 병아리를 차고 문 앞을 달리는데 뭇 아이들이 떠들며 구경한다고 법석을 떨었으나 배덕문은 태연히 독서만 했다고 한다. 10세에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주서(注書),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언양, 영덕, 울산, 고부 등지의 현감, 군수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왜(倭)의 흑전장정(黑田長政)이 제3군을 이끌고 김해에 상륙하였다. 흑전장정은 거창, 고령을 거쳐 음력 4월 27일에 성주목사 제말(諸沫)을 죽이며 성주성을 점령하고, 왜군의 앞잡이가 된 승려 찬희를 시켜 성주 백성들을 도륙하려 하였다. 이에 배덕문이 68세의 노구를 일으켜 성주성으로 쳐들어가 적승(賊僧) 찬희와 적장 흑전구(黑甸句)를 성 아래서 쳐죽이고 성주성을 수복하였다.
당시 배덕문이 적장의 금부채 1자루와 큰 칼 2자루를 빼앗아 후손에게 전했으나, 금부채는 잃어버리고 지금은 큰 칼 1자루만 종갓집에 남아 있다. 아들 배설은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활약했고, 배건은 왜군과 싸우다 여남현(汝南峴)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10년(광해군 2)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증직했고, 1873년(고종 10)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증직하였다. 1920년 후손들이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뒷개 마을에 신도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