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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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廉隴山堤堰功德碑 |
이칭/별칭 | 앵무 공덕비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292-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소윤 |
건립 시기/일시 | 1919년 - 염농산 제언 공덕비 건립[1919년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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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937년 - 염농산 제언 공덕비 건립[1937년 추정]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59년 - 염농산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 염농산 사망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292-8 |
성격 | 공덕비|기적비 |
관련 인물 | 염농산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35㎝[높이]|44㎝[너비]|16㎝[두께]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염농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염농산(廉隴山)[1859~1947]의 초명은 경은(敬恩)이며 1913년 농산(隴山)으로 개명하였다. 기명은 앵무(鸚鵡)이며, 호로 농산(隴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염농산은 경상 감영(慶尙監營) 교방(敎坊)의 관기 출신으로 기예가 뛰어나 명기(名妓)로 이름을 떨쳤다. 대구기생조합, 달성권번의 대표를 맡아 운영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에 100환, 고아원 설립을 위해 50환을 기탁하는 등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사회에 헌신하였다.
[건립 경위]
염농산이 홍수를 막기 위해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에 석축 제방인 두리 방천[豆依防川]을 쌓자, 마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기려 염농산 제언 공덕비(廉隴山堤堰功德碑)를 세웠다. 비 후면에 ‘기미오월오일’이라는 기록이 있어 건립 연도를 기미년인 1919년으로 추정하는 견해와 3.1 운동의 여파로 1919년이 아닌 1937년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292-8에 위치해 있다. 용남면 파출소 동쪽 인근으로 길가로부터 약 10m 떨어진 곳에 있다.
[형태]
전면에 세로로 ‘염농산 제언 공덕비(廉隴山堤堰功德碑)’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고, 좌우에 12구의 4언시가 새겨져 있다. 높이 135㎝, 너비 44㎝, 두께 16㎝이다.
[금석문]
비문의 찬자(撰者)나 서자(書者)는 명기되지 않았다. ‘두리 방천을 쌓아 홍수를 막고, 농토를 개척하여 나라와 백성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며 염농산의 선행을 잊지 말자는 내용을 서술하였다.
[현황]
염농산 제언 공덕비가 세워진 땅의 소유주가 염농산의 친정 종손자인 염익수(廉益壽)이다.
[의의와 평가]
염농산은 민족 운동의 후원자로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거나 기생들의 공연을 통해 재난을 입은 사람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펼치는 등 민족과 사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성주에 두리 방천을 축조한 것 역시 민족을 구제하기 위한 선행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