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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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山紀功碑 |
이칭/별칭 | 무신기공비(戊申紀功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소연 |
건립 시기/일시 | 1784년 - 성산기공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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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684년 - 이보혁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62년 - 이보혁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27~1729년 - 이보혁 성주목사 재임 |
현 소재지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 |
원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198-3 |
성격 | 기공비|사적비 |
양식 | 입비 |
관련 인물 | 이보혁|홍양호|조윤형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90㎝[높이]|81㎝[너비]|28㎝[두께]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에 있는 성주목사 이보혁의 공을 기리기 위해 1784년에 세운 비.
[개설]
성주목사를 역임했던 이보혁(李普赫)[1684~1762]이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을 진압한 내력과 그의 공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 당시 이보혁은 성주목사였다. 그는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 양정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이들과 함께 합천으로 진격하면서 거창의 적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가는 길도 함께 봉쇄하여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면서, 계책을 통해 크게 싸우지 않고 적을 진압했다. 이와 같은 공으로 인해, 이보혁은 수충갈성분무공신(輸忠竭誠奮武功臣)에 책록되었고, 인평군(仁平君)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이보혁은 자가 성원(聲遠)으로, 용인(龍仁) 사람이다.
[건립 경위]
이보혁의 사후 20여 년 뒤인 1784년에 성주 지역 사람들이 이보혁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성산기공비(星山紀功碑)를 건립했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의 탑거리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가 2020년 성주 역사 테마 공원 내 비석군 가운데로 옮겼다.
[형태]
비신(碑身), 비개석(碑蓋石)으로 된 형태이다. 높이는 190㎝, 너비는 81㎝, 두께는 28㎝이다.
[금석문]
유허비의 비신 앞면에는 이보혁의 공과 그를 찬양하는 시가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성주 지역 인물들의 성명을 기록했다. 앞면에 세로 한 줄로 ‘인평부원군 충정 이공 무신기공비(仁平府院君忠貞李公戊申紀功碑)’라 새겨져 있다. 비신 앞면 상부의 전서(篆書)는 ‘성산기공비(星山紀功碑)’이다. 비문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짓고, 전액(篆額)과 글씨는 조윤형(曺允亨)[1725~1799]이 썼다.
[의의와 평가]
당시 성주 지역에서의 이인좌의 난의 경과를 보여주면서, 성주목사 이보혁에 대한 성주 지역 사람들의 의식을 잘 보여준다. 특히 비신에 새겨진 이보혁의 공을 기리는 시에서는, 이보혁의 공적을 성주 지역의 우뚝한 산세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성주 지역에서 그의 공적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성산기공비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운 이보혁을 기림으로써, 노론과 성주 지역 남인 계열의 입장을 다수 반영한 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관권에 대한 협조와 함께 정치적으로 노론 세력을 수용했던 성주 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