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136
한자 苓川里
영어공식명칭 Yeongcheo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영천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규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영천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영천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영천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영천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영천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20.46㎢
가구수 84가구
인구[남/여] 130명[남 76명/여 54명]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영천(苓川)’ 지명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유래는 찾을 수 없다. 영천리의 자연 마을로 중리(中里), 아랫선바우[하립암(下立巖)], 웃선바우[상립암(上立岩)], 하고반(下考槃), 상고반(上考槃), 가은(可隱)[가인(加仁·加人)·가리]이 있다.

중리는 금수면 무학리 챙기와 선바우 중간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무흘구곡(武屹九曲)」 중 제3곡인 ‘무학정(舞鶴亭)’과 제5곡인 ‘사인암(捨印巖)’ 사이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선바우는 대가천의 명승(名勝)인 입암(立巖)[선바위]에서 가까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2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어 선바위에서 멀고 더 위쪽에 있는 마을은 ‘웃선바우’, 선바위 가까이 있는 곳은 ‘아랫선바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반은 조선 선조(宣祖) 때 문신이며 유학자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이 이곳에 내려온 후 강학을 위하여 건립한 고반정사(考槃精舍)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고반정사 윗마을은 상고반, 아랫마을은 하고반으로 불렀다. 가은은 임진왜란 때 각지에서 모인 피난민들이 서로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며 위하고 도와 가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가인(加仁·加人)으로 불렀으나 구전(口傳)되면서 가리로 변하였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금수면의 금천동(芩川洞), 김천군[현 경상북도 김천시]의 외증산면 고방리(古方里)를 병합하여 영천동으로 하고 가천면의 법정동으로 편제하였다. 1917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금수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금수면 영천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영천리는 사방이 400~900m의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들 산지 사이로 대가천이 흐른다. 대가천이 만들어 놓은 좁은 평지를 기반으로 농지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영천리금수면의 서쪽에 자리하여 동부는 금수면무학리봉두리, 남부는 성주군 가천면, 서부와 북부는 경상북도 김천시의 증산면, 지례면과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20.46㎢이며, 영천리 1개 행정리에 84가구, 130명[남 76명, 여 5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영천리의 인구는 1974년 611명에서 1984년 296명, 1994년 189명, 2010년 175명, 2018년 143명, 2021년 130명으로 계속해서 감소하는 추세이다. 가구 수는 1974년 101가구에서 1984년 78가구로 감소한 후 1994년 81가구, 2001년 85가구, 2010년 90가구, 2018년 92가구로 늘어났다가 2021년 84가구로 조금 줄어들었다.

영천리는 임진왜란 때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만들어졌다. 1990년대 중반 영천리에는 전주 이씨 7가구, 성주 이씨(星州李氏) 7가구, 김해 김씨(金海金氏) 5가구, 밀양 박씨(密陽朴氏) 5가구와 여러 성씨의 23가구가 살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노래한 「무흘구곡」 중 제4곡인 ‘입암[선바위]’이 있고, 김우옹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1552~1598]과 관련한 가은서당과 고반정사 터가 있어 봄과 가을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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