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554
한자 具宬
영어공식명칭 Gu Seong
이칭/별칭 원유(元裕),초당(草塘),초당(草堂),충숙(忠肅),능해군(綾海君),능해부원군(綾海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고재로 179[배양리 309-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구자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8년연표보기 - 구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5년 - 구성 사마시 합격하고 이어 별시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구성 승정원주서로 천거되었으나 상피로 임명되지 못함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구성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구성 평해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구성 형조참의, 병조참의, 좌부승지, 우승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96년 - 구성 호조참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구성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지만 사양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구성 홍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구성 아버지 상을 명분으로 석방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구성 호성공신 2등으로 책봉되어 해배
활동 시기/일시 1607년 - 구성 지제교 역임
몰년 시기/일시 1618년연표보기 - 구성 사망
추모 시기/일시 인조반정[1623년] 이후 - 구성 영의정 추증
추모 시기/일시 인조반정[1623년] 이후 - 구성 능해부원군 추봉
묘소|단소 구성 묘역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고재로 179[배양리 309-7] 일대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능성(綾城)
대표 관직 호조참판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배양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구성(具宬)[1558~1618]은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는 헌관(獻官)으로 차출될 때마다 사퇴하는 일 없이 재계하여 집안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엄격하게 일을 처리하여 집사(執事)들이 무서워하였다고 한다. 글을 읽으면 잊지 않았으며, 경전뿐만이 아니라 옛 전례(典例)와 족보(族譜)에 정통하기로 유명하였다.

[가계]

구성의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자는 원유(元裕), 호는 초당(草塘)·초당(草堂),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구희경(具希璟)이고, 할아버지는 구순(具淳)이다. 아버지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이고 어머니는 증 영의정 신화국(申華國)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이다. 동생은 병조판서를 지낸 구굉(具宏)이고, 아들은 인조반정 모의에 참여하여 반정 계획을 세운 공로로 정사공신 2등과 능천군에 봉해진 구인후(具仁垕)이다. 여동생이 원종(元宗)의 비이자 인조(仁祖)의 어머니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어릴 때 궁 밖에서 머물던 인조는 외숙인 구성에게 글을 배웠다.

[활동 사항]

구성은 1558년(명종 13)에 태어났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후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고 곧 박사에 올랐다. 1589년(선조 22) 승정원주서로 천거되었으나 종형(從兄) 구면이 한림(翰林)에 있어 상피(相避)[친족이나 서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는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것을 피함]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후 예조좌랑지제교를 거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된 최영경(崔永慶)의 공초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유로 1592년 파직되었지만 곧 복귀하여 병조좌랑·성균관직강·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변란의 책임이 이산해(李山海)에게 있다고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평해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사헌부지평, 홍문관부응교, 사간원사간, 동부승지,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594년(선조 27) 형조참의, 병조참의, 좌부승지,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호조참판에 임명되어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며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책봉과 전쟁 관련 사안에 대하여 교섭하였다. 1601년(선조 34)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였다. 1602년(선조 35) 정인홍(鄭仁弘)·기자헌(奇自獻) 등이 기축옥사 당시 문제로 다시 탄핵하여 홍주(洪州)에 유배되었는데, 1604년(선조 35) 아버지 구사맹이 사망하자 아버지상을 명분으로 석방되었고 1605년(선조 38) 호성공신 2등으로 책봉되어 유배에서 풀려났다.

1607년(선조 40) 지제교를 역임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제기되었을 때 구성이 병을 핑계로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자 대간이 탄핵을 검토하였으나, 1618년 2월 21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초당집(草塘集)』 2권 1책의 목판본이 전해진다. 권두에 제자 이식(李植)의 서문이 전해지는데, 구성이 지은 시문들과 조정에 올렸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구성의 묘역은 남양주시 진건읍 배양리 309-7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당시 호종(扈從)의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 2등으로 능해군(綾海君)에 책봉되었다. 인조반정[1623년] 이후에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가 원종으로, 정원군의 부인 능성 구씨가 인헌왕후로 추숭되는 과정에서 인조의 외숙인 구성 역시 영의정을 추증 받고 능해부원군(綾海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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