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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110
한자 鳳陽學校
영어의미역 Bongyang School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중앙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판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초등교육기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공유부지[현 경상남도 진주시 중앙동]
설립연도/일시 1910년연표보기
설립자 김기수|강재순 외
교장 강재순[초대교장]
교감 김기수[초대교감]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지역에 있었던 교육 기관.

[개설]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을 위한 사업에 힘을 기울인 학교로, 현 진주시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이다.

[교육목표/교훈]

겉으로는 실용적인 교육을 강조하였으나 민족교육(民族敎育)을 위한 성격이 컸다.

[설립경위]

1909년 순종(純宗)이 각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라는 칙령을 내리자 진주지역의 민족교육과 구국의 뜻을 함께한 김기수, 강재순 등이 모여 1910년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공유부지(현 경상남도 진주시 중앙동)에 사립 봉양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변천]

1910년 개교 당시 입학시험 과목은 산술, 한문, 국한문, 작문, 일본회화였다. 1919년 5월 8일 진주제2공립보통학교(晋州第二公立普通學校)로 개칭하면서 공립으로 전환되었고, 1938년 4월 1일에 이르러 진주제이공립심상소학교(晋州第二公立尋常小學校)로 변경되었다. 1938년 6월 2층 교실 4개를 신축하였고, 1939년 3월에는 9학급으로 증가하였다. 1939년 7월 사립 시원여학교를 수정분교(水晶分校)에 편입하였고, 1942년 3월에 진주봉래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1996년 3월 1일 진주봉래초등학교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활동사항]

1919년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주동자급 23명 중, 설립자 강상호와 당시 학생이었던 박용근, 박진환, 장덕익, 이강우, 최웅림, 정몽석 등이 모두 징역형(懲役刑)을 받았다.

[학생현황]

1910년에는 남자에 한해서만 입학이 허용되었으며 학생 수는 150명이었다. 1912년에는 학생수가 82명, 1915년에는 학생수가 68명이었으며, 1919년까지 7~8회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1921년에는 4학급으로 편성되면서 학생 수는 210명으로 증가하였고, 1923년에 이르러 수업연한이 6년이 되면서 학급수도 6학급으로 늘어나 학생 수는 362명에 달하였다. 1940년에는 본교 1부 9학급, 2부 1학급으로 운영되었고 학생 수는 759명이었으며, 수정분교의 학생 수는 23명이었다.

[교직원 현황]

초대교장은 강재순, 초대교감은 김기수이며, 그 외 김원로가 학교설립에 공헌하였고, 김기태도 학교운영에 참여하였다. 1919년 5월 8일 공립으로 전환되면서 공립 초대교장에 일본인 도원광청(稻垣光晴)이 부임하였고, 1940년 교사수는 본교 10명, 분교가 5명이었다.

[의의와 평가]

근대 사립교육의 산실로 일제강점기에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진주지역의 인재양성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계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일제가 공립으로 전환시킴으로서 그 운명을 다했지만, 이 지역 일대의 민족혼을 일깨워 교육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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