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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801
한자 船運業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국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원석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서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배로 실어나르는 일.

[개설]

경기도 화성시 일대는 리아스식 해안과 많은 섬 등의 유리한 자연 지리적인 환경으로 인해 선운업이 과거부터 활발하였다. 남부 지방에서 올라 오는 물자는 내륙 유통로인 한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성 서부 해역을 거쳐야 했다. 화성의 서부 해역은 하루에 두 번 씩 갯골을 따라 움직이는 조류가 있었는데 화성의 서부 해역에 있는 여러 섬들 사이를 지나며 빨라지는 특징이 있었다. 이 지역을 지나는 배들은 이러한 조류의 특성을 이용해 남북을 오고 갔으며, 이 지역을 거쳐 한강을 통해 서울 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이 물자를 운반하기도 하였다.

[어섬의 선운업]

서울로 향하기 위해 남부에서 올라오는 선박들은 크게 경기·충청권과 전라권으로 나뉘었는데 전라권의 선박들은 대부도 서쪽 두 개의 항로를 이용하였고, 경기·충청권의 선박은 제부도 서쪽 바다를 지나 대부도와 화성시 사이를 통과하는, 현재 송산면 어섬 서쪽의 마산수로를 통해 북상하였다. 어섬 서쪽과 대부도 사이에 나 있는 마산수로는 수심이 깊을 뿐만 아니라 조류가 빨랐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서울과 충청도 사이를 오고 갔다. 마산수로를 지날 때 밀물을 만나면 밀물의 힘을 받아서 한나절 만에 인천까지 북상할 수 있었으나, 썰물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어섬에 정박하여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날 아침에 들어오는 밀물의 힘을 받아 북상해야 했다. 어섬은 이웃한 대부도의 포구에 비해 마산수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마산수로를 통과하여 서울과 삼남 지역을 통행하고자 하는 선박들의 중요한 정박지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어섬의 포구에는 뱃사람들이 머물다 갈 수 있는 여관과 술집이 있었다.

어섬은 밀물과 썰물의 힘을 이용해 항해하기 적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로 이어지는 마산수로 바로 옆에 위치한 자연·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어섬의 주민들은 선운업에 종사하면서 소금, 목재, 쌀, 새우젓 등 주요한 생활필수품을 싣고 전라도, 충청도, 서울을 오고갔다. 또, 어섬 주민뿐 아니라 선운업에 종사하는 많은 외지인들도 조류를 이용하기 위해 어섬에 배를 일시 정박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 이후 많이 쇠퇴하기 시작 했지만, 196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다. 어섬 주민은 짐을 운반하는 ‘짐배’와 연안어업에 사용 하는 ‘전마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한국전쟁 전까지 2~3명씩 동업 형태로 ‘화식이[화시끼]’라고 불리는 30~40톤짜리 화물선을 여러 척 운영하기도 하였다.

[우음도의 선운업]

화성 지역 주변의 수로는 마산수로와 같은 남북뿐 아니라 아산만과 군자만을 가로지르는 동서로도 발달해 있었다. 아산만의 수로는 백석포나 둔포[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등지의 주민들이 주도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군자만에서는 갯고랑 주변에 있는 화성 송산면 우음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간척과 염전 개발 등으로 내륙 포구들은 점차 쇠퇴한 반면, 우음도는 갯고랑을 끼고 있어 항시 배를 댈 수 있었기 때문에 1950년대 이후 마도면, 송산면에 조성된 천일염전의 소금을 운반하기에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우음도의 짐배들은 주로 마도선창에서 마도염전, 신천염전 등에서 생산된 소금과 마도면송산면 일대에서 생산된 벼를 실어 인천과 서울로 운반했으며, 대부도 등 주변 섬 지역에서 나무를 실어 서울로 운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20톤급 화물선인 ‘화식이[화시끼]’가 1940년대 3척에서 1950년대 12척까지 증가하기도 하였다.

[화성 지역 선운업의 쇠퇴]

화성 지역은 배가 물자 운반의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1980년대까지 이 지역의 주요한 교통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송산면 고포리 마산포와 인천 사이에는 여객선이 운행되어 송산면 사람들은 큰 일이 있을때면 인천으로 이동하는 교통 수단으로 이 여객선을 많이 이용하였다. 그러나 도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점차 수원, 안양, 영등포 등지의 육상통로를 이용하게 되었고, 인천과 마산포를 연결하던 여객선과 화물선을 이용하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최신)국토구역총람』(1963)을 보면 1960년대 초 이미 서울-수원-사강을 경유하는 버스 노선을 나타나는데, 1960년대를 전후해 육상 교통이 해상 교통을 앞서기 시작하면서 화성의 선운업이 쇠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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