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015
한자 佛敎
영어공식명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배상현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활동하고 있는 종교.

[개설]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종교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인연의 이치를 헤아려 살라고 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를 이루며 사원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함양군의 불교신앙은 재래의 자연신앙과 결합되기도 하면서 무불(巫佛)이 융합된 형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마애불이 유력한 증거이다. 또한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고자[기복양재(祈福攘災)] 하는 경향과 국가 공동체를 중시하는 호국적 성격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민인들을 중심으로 신행된 함양군 불교신앙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삼국 시대 불교]

함양지역에 언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는지 연원을 알 수 있는 연구 성과는 아직 도출되지 않은 상태로, 많은 내용이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다. 현재로는 일부 고고자료와 사찰의 창건 연기 등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함양지역에는 삼국 시대인 487년(소지왕 9) 안의면 상원리에 장수사(長水寺)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부속 암자로서 용추사의 전신인 암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또 578년(진지왕 3)에 진평왕이 왕자의 신분으로서 군자사(君子寺)를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856년(문성왕 18)에는 행우조사(行宇祖師)에 의해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금대암(金臺庵)이, 이듬해에는 안국사(安國寺)가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864년(경문왕 4)에 영원조사(靈源祖師)가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영원사(靈源寺)를 창건하였으며, 877년(헌강왕 3)에 심광대사에 의해 오늘의 영각사(靈覺寺)가 초창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함양군에는 적어도 5세기경에는 불신앙(佛信仰)이 전래되고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는 불교문화를 활짝 꽃피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불교]

고려 시대는 불교문화가 융성하던 때로, 나라와 백성의 안녕[국태민안(國泰民安)]을 중요시하고 민인(民人)들은 이를 통해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함양지역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으로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은 자연신앙에 기반하여 바위에 새긴 불상으로, 계층을 초월하여 널리 불교가 신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명 ‘부처골’이라 불리는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메아리골 소재의 대덕리사지에 자리잡은 함양 대덕리 마애여래입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9호]은 자연 암반에 새긴 선각 마애불로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설법인(說法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비록 기록을 통해 사적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산포된 유물들로 미루어 신라 말~고려 초 법등을 밝힌 사찰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청자편과 고려 시대 와편(瓦片)[기와 조각]들이 산포하는 덕전리사지에 자리하는 마애여래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깎아 5.8m의 높이로 조각한 것으로 거대한 모습을 자랑한다. 몸체와 대좌(臺座), 그리고 광배(光背)를 모두 나타내었으며, 광배에 보이는 구슬을 꿴 모양의 연주문(連珠紋)과 불꽃무늬, 탑 기단부 형태의 대좌에 새겨진 기둥모양 등은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대대리사지에는 8~9m에 달하는 크기의 암반에 서향으로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이 자리한다. 불상의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높이 솟아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목구비와 주름의 도식성 등으로 고려 중기의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마애불들은 모두 토착의 자연신앙에 바탕을 둔 함양지역 불신앙(佛信仰)의 특징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문헌을 통해 고려 시대 함양군의 불교문화를 읽을 수 있는 대표적 성지(聖地)로는 지리산 상무주(上無主)금대암(金臺庵)이 있다. 861년(경문왕 1)에 영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는 상무주는 보조(普照) 지눌(知訥)[1158-1210]이 뼈를 깎는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고려 시대 선승들의 수행처로 각광받았다. 지눌은 상무주에서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참구하며 깊은 뜻을 깨치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눌 이후에는 원감(圓鑑) 충지(冲止)[1226-1293]가 수행하였다. 충지가 수행하던 당시의 모습은 대사성 김훈(金曛)이 찬한 비문에 ‘선정에 들매 허수아비 같았고,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의 발자국이 무릎에 있었다’라고 묘사되고 있다.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 있는 금대암은 지눌의 제자인 진각(眞覺) 혜심(慧諶)[1178-1234]이 주야로 게송을 읊으며 정진하던 곳이었다. 이렇듯 고려 시대 함양군의 사암들은 많은 불교 수행자들이 머물고 싶어하는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시대 불교]

조선 시대는 숭유억불의 분위기 속에서 불교신앙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에서는 『능엄경(楞嚴經)』이나 『화엄경(華嚴經)』등 기본 불전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불교신앙은 민인들 사이로 더욱 깊숙이 퍼져나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함양지역 불교계에서 주목되는 것은 폐사된 다수의 사찰들이 중창되는 등 함양군의 불교전통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군자사, 추성리벽송사, 가흥리의 안국사, 서상면영각사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군자사는 고려 말~조선 초 왜구의 준동으로 소실된 후 1404년(태종 4) 행호대사(行呼大師)에 의해 중창되었고, 1680년(숙종 6) 누각이 보수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 폐사된 영각사는 1449년(세종 31)에 원경(圓瓊)이 중창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중수가 되었다. 1834년(순조 34)에는 불의의 화재로 거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886년(고종 23) 중수되었다. 통일신라기 가람에 연원하는 벽송사는 1520년(중종 15) 벽송(碧松) 지엄(智嚴)에 의해 중창되었다가, 1704년(숙종 30)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고, 6·25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영원사의 사중에 전하는 『조실안록(祖室案錄)』에 따르면 절은 부용(芙蓉) 영관(靈觀), 청허(淸虛) 휴정(休靜), 사명(四溟) 유정(惟政), 설파(雪坡) 상언(尙彦) 등의 법맥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이는 호국적 불교 전통과 함께 조선 시대 함양군 불교의 건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불교]

근대 불교사에서 함양군의 불교계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찰들은 독립운동의 산실로서도 기능하며 실천불교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영원사화과원(華果院)은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소재의 영원사는 일제 강점기 백초월(白初月)[1878-1944]이 주지를 재임(再任)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은 곳이었다. 백초월은 경상남도 고성 출신으로 본명이 인영(寅榮), 법명이 동조(東照)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만주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함양군 백운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화과원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참여한 백용성의 수행처이다. 백용성은 법명이 진종(震鍾), 법호가 용성(龍城)으로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임야 300여 정보를 확보하고, 수만 그루의 과수를 심어 해외 독립운동의 지원경비를 마련하였다.

2018년 기준, 함양군은 함양읍·마천면·휴천면·백전면을 중심으로 약 60곳의 사찰에서 승려들의 수행과 신자들의 신앙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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