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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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鳩林里[花源面] |
영어공식명칭 | Gurim-ri[Hwawon-myeo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구림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병삼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구림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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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리 -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구림리 | |
성격 | 법정리 |
면적 | 4.637㎢ |
가구수 | 93가구 |
인구[남/여] | 196명[남자 109명|여자 87명]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구림리(鳩林里)는 마을 뒷산 큰봉재가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어서 구등리(龜登里), 거북등이라 불렀다. 이후 큰봉산[199.5m]에 비둘기가 많이 살고 있어서 구림(鳩林)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큰망재 칡덩굴에 몸을 숨기고 항쟁해서 칡더울이라고도 불렀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장동면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림리와 억수리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화원면 구림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구림마을, 억수마을, 섬동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구림마을은 임진왜란 때 김해김씨 김필경이 피난 차 왔다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부터 바닷길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의 사도(沙島)는 풍선을 타고 외부로 나가는 사람들이 바람을 기다리던 후풍처(候風處)였다. 1924년부터 동력선이 운행되면서 뱃길이 빨라졌고, 해방 후에도 ‘용당호’가 목포를 매일 여섯 번 다녔다고 한다. 1994년 금호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뱃길이 끊겼고, 화원조선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사도가 육지와 연결되었다. 억수마을은 1623년 인조반정 때 경주김씨 김을호(金乙浩)가 정착하였고, 그 후로 평산신씨와 통천최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섬동마을은 1746년경 경주김씨 김순희(金順喜)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섬동(蟾洞)은 1789년(정조 13)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장목면에 속한 마을로 나온다.
[자연환경]
화원반도의 끝자락 바닷가에 있다. 남쪽으로 큰봉산[199.5m]을 경계로 마산리, 서쪽으로 천관산(天冠山)을 경계로 월호리와 접하여 있다. 동쪽 바다 너머로 삼호조선소와 목포신외항이 바라보인다. 구림마을과 억수마을은 큰봉산 동쪽 골짜기에, 섬동마을은 서쪽 골짜기에 들어서 있다.
[현황]
구림리(鳩林里)는 북쪽으로 매월리, 동쪽으로 바다, 남쪽으로 마산리, 서쪽으로 월호리와 접하고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4.637㎢이며, 구림리, 억수리, 섬동리의 3개 행정리에 93가구, 196명[남자 109명, 여자 8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일부 농가에서는 어업을 겸하고 있다. 2007년부터 화원지방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배추와 양파를 재배하고, 굴 양식도 한다. 농업용수는 구림저수지, 안골소류지의 물을 이용하고 있다.